日 말살정책에 사라진 유적들…잃어버린 역사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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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읍성 남북수각, 홍수·태풍에 유실 반복…누정 없이 홍문 축조
공신정 일제에 의해 철거…기상청 내부에 터 알리는 안내판 세워져
제이각, 왜적 방어 수단으로 세운 누각…제주시가 2015년 복원해
1900년대 초 산지천 풍경. 왼쪽 위로 공신정이 보인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제주 역사]
1900년대 초 산지천 풍경. 왼쪽 위로 공신정이 보인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제주 역사]

옛 남수문과 북수문에는 남수각과 북수각이각각 있었다.

남북수각은 1652년 홍수와 태풍으로 무너져 버렸고, 얼마지나지 않아 복구공사에 착수했으나 홍수가 터질 때마다 파괴되고 유실되는 사태가 반복됐다.

이후 남북수문 초루까지 없어지면서 남수문에는 제이각, 북수문에는 공신정이 대신 생겨나게 됐다. 그러나 공신정은 일제에 의해 제주신사가 들어서면서 허물어졌고, 제이각은 훼손돼 2015년에 제주시에 의해 복원됐다.

이번화에서는 공신정과 제이각 일대를 살펴보는 역사기행을 떠난다.

 

제주기상청 내부에 있는 공신정 터. 공신정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제주기상청 내부에 있는 공신정 터. 공신정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남수각과 북수각, 그리고 죽서루와 공신정

남수각(南水閣)은 남수문의 누각을 말한다. 남수각은 동성 공사 때는 수구만 축조했으나, 1599년 성윤문 목사 때에 비로소 창건됐다.

동성을 쌓은 지 33년만의 일이다. 이 때 하상(河床)에는 홍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초루를 세웠다. 같은 해 남수각뿐만 아니라 북수각도 함께 지었다. 북수문의 하상에도 홍예문을 쌓고 그 위에 초루를 세웠다. 이 문루가 죽서루(竹西樓)이다.

북신로(北新路)와 공덕동산을 잇는 지금의 산지교가 위치한 북수문 자리에는 북성 홍문지(虹門址) 표석이 서 있다. 그 뒤 남북수각은 16528월 홍수와 태풍으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이원진 목사가 곧 복구공사에 착수, 이듬해 봄에 준공을 보았는데, 북수문루를 공신루(拱辰樓)로 개칭했다. 남북수문은 홍수가 터질 때마다 파괴되고 유실되는 사태가 반복되었다.

따라서 남북수문에는 초기에 문루가 있었지만 뒤에는 누정 없이 홍문만 축조하게 된다. 남북수문의 초루가 없어지면서 대신 생겨난 것이 남수문의 제이각과 북수문의 공신정이다.

공신정은 1652년 이원진 목사가 북수문 위에 세웠으며 1807년에는 한정운 목사가 개축했으나 다시 홍수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해 1831년 이예연 목사가 아예 북수문 동쪽 높은 언덕에 공신정을 이전하게 된 것이다. 그 뒤 공신정은 1920년대 이전의 사진에도 등장하였는데, 1848년 장인식 목사, 1884년 심현택 목사, 1904년 홍종우 목사 등 세 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일제 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28년 일제에 의해서 이 자리에 제주신사(濟州神社)가 들어서면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지금의 기상청 부지에는 동성이 상당히 남아 있어 역사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공신정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이곳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0년대 제주읍성 북수구의 모습.
1910년대 제주읍성 북수구의 모습.

공신정은 원래 1653(효종 4) 제주읍성 북수구 위에 세워진 북두성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의 초루(譙樓)였는데, 1831(순조 31)에 이예연 목사가 민원에 따라 조망이 좋은 이 자리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바로 옆에 제주측후소 건물들이 들어서고, 1928년 경 일인들이 제주신사(濟州神社)를 세우기 위해 공신정을 훼철하였다. 현재당시의 초석 9기를 제주목 관아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동성 일대의 소중한 유적들이 사라져 버린 것은, 일제에 의한 우리의 정체성 말살정책의 일환이고 또한 산업화를 거치며 역사문화를 소홀히 다룬 우리의 탓이기도 하다. 아무리 아픈 역사에도 교훈과 슬기는 배어 있게 마련이다.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 오늘 우리는 이 길을 걷고 있음이다.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는 일은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한 더욱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북수구가 있었던 산지천에 북성교 다리를 세우고 그 근방에 다음의 표지석를 세운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2015년에 복원된 제이각의 모습.
2015년에 복원된 제이각의 모습.

제이각(制夷閣)에 올라 동성(東城)을 보다

제이각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남수각 절벽 위에 세운 누각이다.

최근에 복원된 제이각에 오르면 제주선인들의 유서 깊은 유물유적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문화의 계승을 느끼게 한다. 다음은 2015년에 제주시에 의해 복원된 제이각에 대한 설명문이다.

‘1599(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읍성 남문 동측 치성 위에 건립했다. 지형적으로 매우 가파르고 험한 낭떠러지의 높은 언덕 위에서 제주읍성을 내려다보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그리고 해안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유사시에 왜적을 무찌르기 위한 장대(將臺)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1555(명종 10) 6월 을묘왜변으로 제주읍성이 포위 당하는 등 위협을 느끼자, 방어책으로 1565(명종 20) 12월 제주목사 곽흘은 제주읍성의 동성(東城)을 동쪽으로 옮겨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1599(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은 성곽을 높이고 격대(擊臺)와 포루(砲壘)를 설치하였으며 남성(南城)의 제일 높은 곳에 제이각을 세워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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