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4·3으로 소실된 제주지역 초등학교 재건에 힘써
(109)4·3으로 소실된 제주지역 초등학교 재건에 힘써
  • 제주신보
  • 승인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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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학, 재경도한인유학생회 활동
김시형, 제주대 아라캠퍼스 이설 앞장
김시황, 북제주교육구 교육위원 지내
김시희, 조천 독립만세운동 주도 인물
김신형, 일본 도쿄서 항일 활동 펼쳐
김양수, 최익현과 교류…한시로 유명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옛 북제주군 교육청의 모습. 건물 내부를 리모델링해 현재 제주도교육청 전산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북제주교육구 교육위원으로 선출된 김시황은 1952년 8월 초대 북제주교육구 교육감에 김시형을 선출했다. 김시형은 4·3사건으로 소실된 초등학교 재건에 앞장섰다.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옛 북제주군 교육청의 모습. 건물 내부를 리모델링해 현재 제주도교육청 전산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북제주교육구 교육위원으로 선출된 김시황은 1952년 8월 초대 북제주교육구 교육감에 김시형을 선출했다. 김시형은 4·3사건으로 소실된 초등학교 재건에 앞장섰다.

김시학金時學1881(고종18)~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자는 효원効元이요, 호는 동강桐岡이다. 김해김씨 김진호金振鎬3남으로 산북 조천리<梨洞>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사 등 자료에 따르면 재경도한인유학생회在京都韓人留學生會 총회에서 간사幹事에 김우영을, 회계에 김시학을, 서기에 경석우慶錫祐 등을 선출했다.”는 기록의 보인다.

이 단체는 궁극적으로 조국독립의 길과 이론을 책원하는 조직적인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일제의 감시와 미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에 김시학은 “1917년 겨울 임규林圭, 신익희申翼熙 등을 만나 현하 정세로 보아 덕국德國(독일)이 승승乘勝하니 왜적이 멸망할 기운이 박두했다. 고로 이번 전란(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세계가 개조開造될 것인 즉, 우리나라가 광복될 호기는 바로 이때이다. (중략) 우리는 어떠한 계획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김시학의 친형 만취晩翠 김시우金時宇는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한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당대의 유명한 민족주의 유학자였다.

또 김시학의 아들 김장환金章煥도 서울의 휘문고보徽文高普 재학 시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해 백부 김시우의 소기小忌날에 먼저 그의 근친들에게 서울소식을 잘 알렸고, 이 일이 제주에서 조천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起爆劑 역할을 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시형金時瀅1904(광무8)~1976, 교육자. 북제주교육구 교육감. 본관은 김해이며 구좌읍 평대리<-머리>에서 태어났다. 초등과정인 사립 명진明進학교를 거쳐 19263173명이 응시해 40명을 뽑는 제주농업학교에 들어가 24명중 8위로 졸업하고 광주도립사범학교 강습과 1년을 수료해 초등교육에 종사, 전남 화순교和順校와 능주교綾州校의 교장을 거쳤다. 일제 말기에 전라남도 시학視學(장학사)으로 발탁되었다.

19458월 해방 당시 전남 학무과에는 과장 및 시학 8명이 학무 행정을 맡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시형과 조시형趙時炯(전남)이 일제 당국으로부터 학무 행정을 이양 받는 역할을 담당, 과도기의 전남교육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귀향 후 초등교장으로 재임할때 시군 단위의 교육자치제가 실시됐다. 따라서 19528월 북제주교육구의 초대 교육감(제주시 포함)으로 당선되고 4·3사건으로 소실된 초등학교 재건에 힘써 2년 만에 석조 스레트의 정규 교실 수 10여 개의 학교를 신축했다.

북제주교육청(제주시) 관내의 학교를 전국 유일의 석조 건물로 완성한 것이 이때의 일이다. 이는 주민들의 자체의 노력으로 석축이 이루어졌다. 그는 19574월 제2대 북제주교육구의 교육감(제주시 제외)으로 재선됐다. 그뒤 제주대학 이설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아라我羅캠퍼스의 이설 기반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김시황金時璜1909(융희3)~1956(분단시대), 광주 학생운동 당시 광주고보의 항일 활동. 지방의회 의원. 교육위원, 교장 김태환의 선친. 본관은 김해, 조천읍 조천리<梨洞>에서 김사호金思鎬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전남 광주 향사동에 살면서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 , 졸업 4~5개월 앞둔 192911월 전남 광주에서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적으로 번져 동맹휴학과 집단시위로 발전했다.

결국 1929113일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났고 그는 일경에 붙잡혔다. 1930226일 광주지법에서 금고 4월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아 미결 기간 6개월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는 후일 초등교육(사숙)에 종사했다.

조국이 광복된 후 1952년 초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에서 조천면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어 북제주교육구 교육위원으로 선출되어 초대 북제주교육구 교육감에 김시형金時瀅을 선출했다. 정부에서는 1999815일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시희金時熙1882(고종19)~?,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항일 활동. 일명 김윤희金允熙, 산북 조천리<梨洞> 태생으로, 김시범은 김시은, 김장환과 함께 317일경 조천리 미모치味毛峙(미밋동산)에서 거사 발의를 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조천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이 1919321일부터 4일간에 걸쳐 일어났는데 제1차 운동을 주도한 관계로 그는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 등과 함께 체포당해 동년 4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칙령勅令 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지 않았다.

 

김신형金辛亨1921(일제강점기)~1969, 일본 도쿄에서 학생의 항일 활동. 1946년 김신형金辛亨으로 개명. 본관은 김해, 김호준金好俊44녀 중 차남으로 산북 한림리<-수풀>에서 태어났다. 단국檀國대학 교수 김영하金嶺廈 박사의 선친.

그는 19414월 와세다<稻田>대학 부설 실업학교 야간부에 입학, 낮에는 항공 기계공장 직공으로 있으면서 해외에서 독립 운동 소식도 몰래 듣고 일본이 패전할 경우 동지들과 결속해 독립 쟁취에 힘쓰기로 마음먹었고 19428월 중순부터 동지를 4명 포섭했다.

그의 동지 중 2명은 전남 출신이고 1명은 부산 출신이며 다른 1명은 서귀포시 토평리 출신 오유붕吳維鵬이었는데, 이들과 자주 만나 민족적 독립 사상을 피력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는 고향 한림읍에 소방장비와 행정장비를 기증해 19673월 장의봉張義鳳 한림읍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김양수金亮洙1828(순조28)~1887(고종24), 문사. 자는 자명子明, 호는 난곡蘭谷, 본관은 경주, 조천읍 조천리에서 진사 김석린金錫麟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4(고종11) 신암新菴 김치용金致鏞과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지방 사림에 종사했다. 유배인 최익현崔益鉉과 종유從遊하면서 문사文詞에 출입, 그의 한시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글 연상루延祥樓 중수상양문이 현재까지 전해지며, 그의 율시를 모은 난곡집蘭谷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