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방어유적 ‘운주당 터’ 복원은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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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당, 왜침 대비해 고지대에 세워
청상고 등 제주성 작전참모부 배치후일 본향당 두고 마을 수호신 모셔
연무정, 조선시대 군사 훈련하던 곳
광복 후 이곳에 제주동초교 들어서
동문루인 연상루에 돌하르방 8기
국립민속박물관 등으로 각각 이동 
1914년 제주성 동문 밖 돌하르방. 일제가 토지측량을 실시할 표본지구로 제주도를 선정하면서 남긴 기록사진.
1914년 제주성 동문 밖 돌하르방. 일제가 토지측량을 실시할 표본지구로 제주도를 선정하면서 남긴 기록사진.

관아의 건물이였던 운주당 일대에는 조선시대 무기를 보관하던 청상고(淸箱庫) 등 제주성의 작전참모부가 있었다. 운주당은 후일 마을 수호신을 모신 일도동 본향당으로 쓰였다. 최근 운주당 터에서 장초석 등 주춧돌이 발견되며 유적을 복원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운주당은 현재 복원중에 있다.

운주당 일대를 둘러본 뒤 지금의 동초등학교 근방에 있는 연무정 터와 동문이 있었던 연상루지 일대를 돌아본다.

 

제주읍성의 작전참모부가 있던 운주당

1568(선조 1)년 곽흘 목사가 동성을 뒤로 물려 지우면서 적의 침입을 잘 관찰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운주당을 창건했다.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편액을 지었으며, 1683(숙종 9) 신경윤 목사가 중창, 1694(숙종 20) 이익태 목사가 중수, 1743(영조 19) 안경운 목사가 증수, 1753(영조 29) 김몽규 목사가 중수했다. 1892년 화재로 소실돼 찰리사 이규원이 개건했으나, 해방 이후 화재가 다시 발생해 소실됐다 전해진다.

운주유악지중(運籌帷幄之中)에서 나온 말인 운주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이다. 운주당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청상고(淸箱庫) 등 제주성의 작전참모부가 있던 자리로 제주의 장대(將臺)였다. 장대는 전쟁 시 군사 지휘에 용이한 곳에 두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규모가 큰 성곽에 두었으며,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는 일찍부터 자주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면 이른바 운주지책(運籌之策)을 쓰도록 하여 운주당으로 작명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운주당은 관아의 건물이었으나 후에는 마을 수호신을 모신 일도동 본향당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운주당으로 올라오는 길 주변 마을을 운주당골, 주위의 들판을 운주당드르라고 불렸다. 1950년대부터 김태민과 고수선 부부가 거처하던 집터이기도 하다.

김태민은 제주인으로 제1호 정규 외과의사로 장춘병원을 개업했으며, 민중 해방운동의 선구자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고수선은 대정읍 가파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자이자 항일운동가였으며, 광복 후 한국인 제1호 여의사이자 사회복지사업가로 이곳에 제주모자원과 홍익보육원을 개설운영 하기도 했으며, 1회 만덕봉사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한때 이일선 스님이 이곳에 절을 창건하기도 했으며 축대 일부가 최근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최근 장초석 등 주춧돌이 발견되고 유적을 복원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의해 운주당은 지금 복원 중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복원 중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복원에 대한 진척이 거의 없어 보인다.

탐라순력도에 묘사된 제주읍성의 작전참모부가 있던 운주당(運籌堂).
탐라순력도에 묘사된 제주읍성의 작전참모부가 있던 운주당(運籌堂).

연무정으로 가는 동문한질

한질은 큰길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동문한질은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구와 조천포구로 이어지는 한질이다. 동문한질가에 세워졌던 연무정은 지금의 제주동초등학교 근방에 있었다.

연무정은 조선시대 군사를 훈련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광양땅에 있었으나 태풍과 홍수로 무너져 지금의 동초등학교로 옮겨왔다.

연무정이 있었던 동초등학교 교정에도 여러 역사적 부침이 숨어있다. 1943년 일본인 교장에 의해 제주서국민학교가 개교됐으나 학교부지가 비좁아 동년 예전의 제주목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던 연무정 터전으로 이설됐다.

그리고 제주공립아사히국민학교라고 교명을 바꾸며 황민화 교육을 실시했다. 해방 후 제주동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입학식과 개교식을 거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제주동초등학교 정문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의 내용이다.

연무정(演武亭) : 조선시대 군사훈련을 실시하던 연무정터이다. 1636(인조14) 신경호 목사가 처음 제주 남문 밖 광양에 창설했다. 1741(영조17) 태풍으로 무녀졌으므로 1746(영조22) 한억증 목사가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했으나 1921년 한때 감옥이 설립됐다가 철거됐으며 광복 후 제주동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동문이 있었던 터인 연상루지(延祥樓址)

동문의 성문인 연상루 입구에는 돌하루방 8기와 목사들의 선정비 10여 기가 서 있었고, 예전의 동문파출소 남쪽 일대에는 1960년대에 동성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 뒤 돌하르방들은 다른 장소로 분산, 이전되었으며, 선정비 등은 신산동 일대로 옮겨졌다가 신산지구 토지 구획정리 사업을 하면서 국립민속박물관 등지로 분산됐다.

동문루인 연상루가 자리했던 곳은, 동문파출소에서 동문로 건너편 동쪽 사거리에서 기상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으며, 지금도 근방에서는 당시의 기초석으로 보이는 기단석이 보이기도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성 동문밖에는 돌하르방 8기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62년 돌하르방을 조사한 현용준 선생은 제주석상 우석목 소고라는 글에서 그 당시 돌하르방들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돌하르방은 관덕정 앞 4, 뒤쪽에 2, 삼성혈 삼성사 앞길 2, 삼성사 입구에 4, 남문통 만수당약방 앞 우물통 골목에 1, 동문로터리 현 명승호텔 앞(옛 삼천서당 북측남측 입구)4, 동문통 감리교회 뒤쪽 소로에 8기 등 도합 25기가 있다고 했으며, 이 가운데 감리교회 8기만이 원래 위치의 돌하르방이라고 언급했는데, 8기가 그 당시 동문 원위치였다. 동문 밖으로 난 S형 소로의 한굽이에 좌우 각 2쌍씩 4기와 약 50미터 떨어진 또 한굽이에 좌우 각 2쌍씩 4기가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연유(緣由)인지 동문의 8기 돌하르방은 제주도청(:제주시청) 2, 제주대학교 2, 제주민속박물관 2(:KBS 제주총국), 제주를 떠나 국립민속박물관에 2기가 옮겨지며, 새로운 유랑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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