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감귤원 9만4847㎡ 기증…후일 제주대병원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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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필, 제주향교 명륜당 보수 앞장서
김양홍, 우리나라 최초 교구장
김여, 김만일 손자…다경포만호 등 역임
김여석, 서당 훈장·항일 활동
김여종, 제주대학교 장학회 기틀 마련 
김연배, 조천 만세운동 참여
제주시 아라1동 제주대학교병원 건물과 병원 입구에 위치한 서암교의 모습. 서암 김여종 선생은 1983년 4월 7일 감귤원 24필지 9만4847㎡을 기증, 재단법인 ‘제주대학교 장학회’의 기초를 닦았다. 기증한 땅은 아라동 제주대학교병원 신축을 위한 부지로 사용됐다. 제주대학교병원은 신축병원 건립 과정에서 만들어진 병원 입구에 위치한 다리의 이름을 서암교로 정했으며, 병원 1층 로비에는 서암홀을 마련했다. [사진=네이버 로드뷰]
제주시 아라1동 제주대학교병원 건물과 병원 입구에 위치한 서암교의 모습. 서암 김여종 선생은 1983년 4월 7일 감귤원 24필지 9만4847㎡을 기증, 재단법인 ‘제주대학교 장학회’의 기초를 닦았다. 기증한 땅은 아라동 제주대학교병원 신축을 위한 부지로 사용됐다. 제주대학교병원은 신축병원 건립 과정에서 만들어진 병원 입구에 위치한 다리의 이름을 서암교로 정했으며, 병원 1층 로비에는 서암홀을 마련했다. [사진=네이버 로드뷰]

김양필金良弼문인. 제주 교수. 본관은 경주, 제주시 영평리<가시나->에서 태어나 중종 때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해 관직이 교수에 이르렀다. 1520(중종15) 충암 김정金凈이 제주에 유배 온 때 따라 교유하면서 충암으로부터 문학이 뛰어나고 지덕이 겸비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1534(중종 29) 겨울 제주목사 심연원沈連源을 도와 남성 밖에 향학당을 세우고 1536년 가을 제주향교의 명륜당을 보수했으니 이는 모두 그의 계획과 지도로 이룩된 것이다. 필원筆苑으로 알려진 그의 명륜당 현판시懸板詩의 글씨나 백녹동규白鹿洞規의 글씨는 더욱 유명하다.

김양홍金洋洪1874(고종11)~1945(일제강점기), 천주교 신부. 세례명은 스테피노. 1882(고종19)부터 1884년 사이에 페낭Penang으로 유학한 2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현지로 떠났다.

그는 190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전라도 지방을 맡아 18개 공소를 순회, 사목과 전교 활동을 했다. 1915년 전북 어은동魚隱洞을 중심으로 사목하다가 동년 67일 제주성당으로 전입되었다.

김양홍 신부는 신성여학교의 보존을 위해 힘쓰기도 했다.

1931년 전라도 지방이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되자 김신부는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됐고 이후 전주지목으로 임명,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의 교구장이 되었다.

김여金礪무신. 본관은 경주,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의 손자이고, 김대성金大聲의 아들로 정의현에서 태어났다. 선조 때에 무과에 급제, 1622(광해군14) 전남 영광군의 다경포만호를 역임했다. 집안이 삼대三代에 걸쳐 축산업에 크게 성공, 산마山馬 감목관이 세습직으로 이어져 1652(효종3) 희생우犧牲牛 20두를 조정에 헌납, 1659(효종10) 208필을 헌납했다.

김여석金汝錫1891(고종28)~1961, 서당 훈장, 일명 김여영金汝暎, 호는 오학梧學, 한문서당 훈장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산북 한경면 낙천리<-세미> 1911번지에서 김대일金大鎰의 차남으로 재래식인 서당에서 민족자존과 외세 배격을 강조하면서 한문 교육을 실시해 왔는데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마당에 항상 일제의 침탈과 만행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훈장들은 학동들에게 이러한 독립운동 내용을 가르치면서 국권회복의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특히 이들을 분개하게 한 것은 도내 유림의 지도자와 한말 관료들이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란 명목으로 동년 10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막대한 은사금恩賜金과 기로금耆老金 등을 받아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낙천리의 훈장 김여석(27낙천조무빈趙武彬(33낙천), 또 신촌리의 훈장 신계선申啓善(45신촌) 등은 의기투합해 항일의거의 고사라는 제천의식을 거행한 다음,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작성해 다중이 볼 수 있는 장소에 붙이다가 발각돼 체포됐다. 정부는 고인이 공훈을 기리어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여종金麗鍾1926(일제강점기)~1984, 교육 독지가, 제주대학교병원 부지를 기증, 호 서암瑞巖, 본은 경주, 제주시 아라동 <아라위>에서 김세태金世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44년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제의 강요로 일본군에 입대했으나 이듬해 조국이 해방이 되자 귀향했으나 19484·3사건으로 집은 잿더미로 변해, 그는 서울로 올라가 국민대학에 들어갔고 2학년 때 6·25가 터져 학업은 중단됐다.

그는 경찰전문학교를 나와 공직에 5년 근무, 1957년부터 운수업에 뛰어들어 화물차 70~80대를 갖춘 사업으로 성장, 1968년 국도자동차학원을 차렸다.

1972년 그의 부친이 팔순을 기념하려고 고향에 28000여 평을 매입해 감귤원을 조성했다.

김여종은 198310여 년 운영하던 서암瑞巖농장을 제주대학교에 기증하는 장거壯擧를 실행했다. 그는 이후 단신으로 상경, 약사로 성공했다.

김여종의 공에 힘입어 대학 측에서는 장학회를 조직했고 1983~1993년까지 수혜 학생은 530여 명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공로를 기려 병원에서는 2010716일 그의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서암을 기리는 비문에는 “198347일 감귤원 24필지 94847를 기증해 제주대학교 장학회의 기반을 마련, 후일 그 부지에 제주대학교 부설 의대를 개설했다.”라고 새겨져 있다.

 

김연배金年培1896(고종33)~1923(일제강점기),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항일 운동. 본관은 김해, 김희호金熙鎬의 장남으로 산북 조천리<墨洞>에서 태어나 1914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1931일 이후 조천 지역에서 항일 운동이 고조되어 나가고 있던 상황에 직접적인 도화선을 제공한 이는 김시범, 김시은의 조카인 김장환金章煥이었다. 김시범은 김시은, 김장환과 함께 317일 경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 발의를 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319일까지 규합된 인원은 14명의 동지인 김시범, 김시은, 고재륜, 김형배, 김연배, 황진식, 김용찬, 백응선, 김장환, 박두규, 이문천, 김희수, 김경희, 김필원 등이다. 김연배는 혹독한 고문 후유증에 오랜 병환으로 시달리던 중 1923112628세로 요절夭折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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