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샘물이 있는 학교…유림 교육의 중심지로 우뚝 
세 개의 샘물이 있는 학교…유림 교육의 중심지로 우뚝 
  • 제주신보
  • 승인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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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 북쪽 언덕 해산대·달관대
골짜기·샘물 등 수려한 경관 ‘절경’
김정 목사가 인근에 삼천서당 세워
학문 장려하며 수많은 인재 배출해
산지천변에 있던 4기의 돌하르방
제주대·자연사박물관 등으로 이동
일제시대 제주성안에 살았던 일본인 다케노 세이기치가 기억에 의존해 1909년 당시 산지천 일대를 그린 풍경. 맨 앞부터 동문과 삼천서당, 공신정이 차례대로 보인다.
일제시대 제주성안에 살았던 일본인 다케노 세이기치가 기억에 의존해 1909년 당시 산지천 일대를 그린 풍경. 맨 앞부터 동문과 삼천서당, 공신정이 차례대로 보인다.

제주성 북쪽 높은 언덕에 해산대와 달관대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단애를 이루고 있는 동산 위에 있었다. 이 두 곳 사이에 있었던 삼천서당은 제주 수재들을 길러냈던 명문사학으로, 임항로에서 기상청으로 오르는 곳에 가면 이를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삼천서당이 있던 터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4기의 돌하르방이 있었으나, 사람들의 무관심 속 방치됐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삼천서당 일대를 둘러본다.

 

절경 위에 세워진 달관대(達觀臺)와 해산대(海山臺)

동성(東城) 일대는 주로 옛 유적과 교육문화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제주성에서는 제일 높은 고지대로 장대(將臺) 등의 군사시설이 있었다. 더욱이 산봉우리, 바위 언덕, 고목, , 계곡 등이 어우러진 경승지로 이름난 명소들이 많았다.

운주당과 소래기동산은 제주성 남쪽 높은 언덕에, 해산대와 달관대는 제주성 북쪽 높은 언덕에 있었다.

특히 해산대와 달관대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단애를 이루고 있는 동산 위에 있었다. 암벽 동산 남쪽으로 높은 기암이 솟아 있는 곳에 달관대가 있었고, 동서 쪽으로 뻗은 바위 언덕에는 해산대가 위치했었다. 가파른 바위로 형성된 자그마한 공간에 달관대가 위치한 반면, 등마루에 넓은 공간이 있었던 해산대에 공신정과 제승정을 세우기도 했다.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에 따르면, ‘제주읍 일도리 삼천서재 남쪽에 있다. 매우 가파른 절벽에 높이 솟아오른 바위와 나무숲이 울창하고 사계절 경관을 이룸에 (제주목사) 김정이 달관이라 명명하였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경관이 매우 수려한 곳이었다.

달관대 아래에 감액천과 급고천이 있었으며, 해산대 밑으로는 지금도 산지천(山地泉, 山底泉)이 솟아나고 있다. 달관대 일대에는 골짜기와 샘, 나무와 숲이 어우러져 마치 선경 같은 가경이었다고 전한다.

1736(영조12) 노봉 김정 목사가 주변을 정비하고 달관대라 명명한 뒤 이곳은 시인 묵객들의 휴식, 조망터, 시화 주연터가 되기도 했었다.

이곳 경관에 감탄한 김정 목사는 바위 모양이 마치 병풍을 세워놓은 것 같다고 하여 바위마다 중장병(中藏屛), 호반병(虎班屛) 등 병()자를 붙여 각명(刻銘)을 해 놓았다.

삼천서당(三泉書堂)과 노봉 김정 목사

삼천서당은 제주에서 운명한 김정 목사가 1735(영조11) 달관대와 해산대 사이에 있는 기슭에 세웠던 학교이다. 다시 1843년 이원조 목사가 중수하고 보수를 거듭한 서당 건물은 해방 이후까지도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

달관대 기슭에 10칸 본채를 중심으로 대문과 장랑채가 본채를 자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제주기상청 바로 남쪽에 개설된 삼천서당은, 조선시대 제주의 많은 수재들을 길러냈던 명문 사학이다. 이를 알리는 표석이 임항로에서 기상청으로 오르는 곳에 세워져 있다.

경북 봉화군 출신인 김정 목사는 배움에 갈증을 느끼던 제주선인들을 위해 삼천서당을 세워 학문을 장려하고 삼사석을 정비했으며, 화북포구를 증축하던 중 화북진에서 사망했다.

영조대왕은 전라, 충청, 경상도에 영을 내려 그의 시신이 제주에서 그의 고향으로 갈 때까지 각도 역군들이 절도사의 예를 다해 영접하도록 관문(關文)을 내렸는데, 이 관문은 김정 목사 가문에 보관되어 있다 전한다.

제주 유림들이 장지까지 따라갔으며 그의 고향에는 제주에서 가져간 솔씨를 심어 자란 소나무 숲이 있다 전한다. 이를 기려 삼천서당 존현당에 노봉김선생 흥학비가 세워졌고, 이 비는 1958년 삼천서당이 헐리면서 오현단 경내로 옮겨졌다. 제주 유생들이 올린 진정서에 따라 김정 목사는 영혜사에 모셔지기도 했었다.

김정 목사가 삼천서당이라 당호를 지은 것은 경내에 세 개의 샘인 감액천, 급고천, 산지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봉 김정 목사는 삼천서당 상량문에서 무리가 있으면 학교가 있어야 하고 집이 있으면 글방이 있어야 하는데, 천년을 두고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제 겨우 이루게 되었다.’라고 삼천서당에 대해 기록했다.

원래 연당(蓮堂)이 있던 이곳은 선비들이 활을 쏘고 말을 달리던 자리였다.

1959년 삼천서당 입구에 있던 돌하르방의 모습.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1959년 삼천서당 입구에 있던 돌하르방의 모습.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삼천서당 인근 돌하르방

삼천서당터가 있던 산지천변에 1960년대까지만 해도 4기의 돌하르방이 있었다. 제주목관아에서 칠성로를 따라 중인문과 광제교를 거쳐 동문으로 올라가던 옛 골목 입구는 이전에 삼천서당의 남쪽 입구가 있었고, 돌하르방 2기가 사람들이 무관심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후 2기의 돌하르방은 용담동에 자리하고 있던 제주대학교로 옮겨지고, 아라동 이전과 더불어 제주대학교 구 박물관 입구를 거쳐 현재의 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에 동문에서 옯겨진 돌하르방과 함께 세워져 있다.

옛 명승호텔 앞쪽 산지천변에 2기의 돌하르방이 있었는데, 2기의 돌하르방은 1963년 명승호텔 사장이었던, 고춘호씨에 의해 지금의 삼성혈 건시문 앞으로 옮겨지고, 이 시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산지천 복개 계획이 수립되어, 복개 설계가 완성되는 시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