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광령 천아계곡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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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시인·수필가·前 애월문학회장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무심코 내다 본 창 너머 풍경, 가을 하늘이 가득하고 가을이 깊고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끝없이 떠도는 시인의 마음처럼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천아 계곡을 찾아 나섭니다. 차가 지날 때마다 부드러운 음악처럼 한 차례씩 몸을 뒤채는 길섶 코스모스 무더기는 낮에 뜬 은하수입니다. 여윈 몸을 길게 하늘로 뽑아 올려 고개 숙인 수수모감의 명상이 깊습니다.

가을 햇살에 취한 감나무 열매들은 성글어지는 잎사귀와 반비례하여 주홍빛 얼굴이 말갛게 짙어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푸른 하늘만을 배경으로 말갛게 익어가는 감, 가지마다 홍시로 변해가는 감들이 무겁게 매달렸습니다. 가을이 알알이 붉게 익어 가고 있습니다. 붉게 물든 감나무 잎잎에는 오후의 바다처럼 가을 햇살이 몸을 뒤채고 있습니다. 가을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노형동 축산단지 마을 지나자 운전하는 눈에 가장 많이 들어오는 것은 억새였습니다. 여린 바람에도 한없이 낮은 자세로 몸을 낮추었던 억새들이 은갈색 머리카락을 흔들며 부드럽게 일어섭니다. 몸을 낮추 때마다 나를 닮으라 나를 닮으라 서걱 입니다.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가 가을이라 했습니다. 뒤로 뒤로 밀려나는 억새를 바라보며 내 몸짓으로 당당히 뒤흔들리다 저 억새의 머리채처럼 한없이 낮추면서 온통 은빛으로 소멸해가리라는 다짐을 되뇌어 봅니다.

산을 보아도, 벌판을 보아도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어머니의 눈길처럼 골고루 햇빛이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민초의 모두 일에도 소외 없이 이와 같기를, 그리고 취업난에 아파하고 간절한 청춘들에게 원하는 결실 맺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경기 침제로 이 땅의 민초들 생활이 너무 어렵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자는 그 바퀴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 즉 결국 민초들의 몫이기 때문에 더 간절합니다.

천아 계곡은 저만치 산꼭대기에서 시작하여 골을 타고 내려와 마지막 빛을 다하여 붉게 타오른 단풍의 물결이 골짜기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정말 장관이고 비경입니다. 하늘도 단풍입니다. 하늘 단풍이 하도 고와 그 아래 흰 옷을 입고 서면 쪽빛 물이 들것만 같은 날입니다. 가을 햇살은 붉은 단풍과 듬성 듬성 서 있는 푸른 솔에도 눈부시게 쏟아져 내립니다. 눈돌리는 곳마다 가을빛, 가을 소리, 가을 맛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깊은 가을 속을 걷고 있는 느낌입니다. 곧 길 떠날 채비를 차리는 누이의 모습 같습니다.

수락이석출(水落而石出)입니다. 가을에는 계곡물이 야위면서 물빛은 한결 투명해지고, 그러면 얼굴만 살짝 내밀고 있던 돌들이 몸까지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냅니다. 몸은 여위어 가지만 눈빛은 더욱 깊어가는 수행자 같습니다. 오늘 누가 나에게 나의 삶을 묻는다면 나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만 자꾸 넓어져 가고 깊어져 가는 가을 하늘이 허허롭고 또 허허로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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