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 주변 비경에 찬탄…영주십경 중 3경을 남겼다
동성 주변 비경에 찬탄…영주십경 중 3경을 남겼다
  • 제주신보
  • 승인 201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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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향교 교수 고처량·매계 이한진, 삼천서당 세워 훈학에 앞장
고서흥 선생 노력으로 공덕동산 개통…건입동-동문로 쉽게 왕래
제주항 공사로 금산 일대 수원지 변모…유서깊은 문화 현장 지켜야
제주시 건입동과 동문로를 잇는 공덕동산에 있는 고서흥 공덕비. 이 동산에 길을 뚫은 고서흥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제주시 건입동과 동문로를 잇는 공덕동산에 있는 고서흥 공덕비. 이 동산에 길을 뚫은 고서흥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제주선인인 고처량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삼천서당이 세워질 수 있었다. 고처량은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며 김정 목사에게 청해 동성 안에 삼천서당을 세우도록 권유했다. 영주십경(瀛洲十景)으로 알려진 매계 이한우는 훗날 이곳에서 훈학을 펼치기도 했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삼천서당 일대를 둘러본 뒤 고서흥이 건입동과 동문로를 이어 길을 낸 동덕동산과 많은 문화명소가 있던 유서 깊은 현장인 금산공원을 돌아본다.

 

삼천서당의 두 주역인 제주선인 고처량과 이한진

삼천서당 탄생 뒤에는 제주선인인 고처량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례현감과 제주향교 교수를 지낸 고처량(1688~1762)이 일찍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김정 목사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제주에는 토관 자제들 중심으로 다닌 서원으로는 귤림서원이 유일했다. 훈학을 받고자 하는 제주 젊은이들의 바람을 잘 알고 있던 고처량은 이를 김정 목사에 적극 알리고 삼천서당을 세워 훈학 펼치기를 권유해 뜻을 이루게 된다.

한편 삼성사에 주벽(主壁)으로 모셔왔던 위패 봉안이 잘못된 것을 알고 1740(영조16) 9월 판관 고한장과 함께 안경운 목사에게 품자(品字) 형으로 환원해 모실 것을 건의하니, 고을라를 주벽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영주십경으로 알려진 매계 이한우(이한진: 1823~1881)는 이곳에서 훈학을 펼치기도 했다. 신촌에서 태어난 이한진은 1840년 대정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를 찾아가 수학하기도 했다. 1873(고종 10) 제주에 유배 온 면암 최익현도 매계와 만나 서로 우국충정에 대한 뜻을 나누기도 했다. 향시에 합격 누차 상경하여 전시에 응했으나 불운하였다. 천문, 역사, 병서 등 통하지 않음이 없을 정도였다.

1853년 제주에 부임한 목인배 목사는 매계 이한우의 글솜씨를 남국산두(南國山斗)라 칭했다. 남국의 태산이며 북두칠성이라 칭할 정도로 매계는 당시 제주문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글재주는 당시 제주 모든 고을에 전해지고 제자들이 삼천서당으로 몰려들 정도였다고 전한다. 매계는 동성 주변의 아름다움을 찬탄하여 10경 중 3경을 남겼는데, 2경인 사봉낙조, 5경인 귤림추색, 9경인 산포조어가 그것이다.

금산공원 물사랑홍보관 곁에는 샘물인 지장깍물이 있다.
금산공원 물사랑홍보관 곁에는 샘물인 지장깍물이 있다.

고서흥이 이룬 공덕동산을 오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제주선인 중 고서흥이란 인물이 있다. 건입동과 동문로를 잇는 가파른 동산을 공덕동산이라 한다. 이 동산에 길을 낸 장본인이 고서흥이다. 이를 기리기 위하여 다음의 글을 담은 공덕비가 공덕동산에 세워져 있다.

이 마을 건입동은 상하동 간 절벽이 심하고 일부는 바다에 인접해 워낙 궁지(窮地)함으로 도로를 개설할 것을 향민들이 갈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든 차 당시 경민장(警民長) 고서흥이 향회를 열어 도로를 개설할 것을 부의한 결과 흉년으로 생활고에 시달려 향민들이 반대하자 고서흥이 단독으로 조 삼백 석을 내놓아 석공과 인부를 동원해 공사를 하여 만인이 편안하게 왕래할 수 있도록 했으니 이 어찌 아름다운 덕행이 아니리오. 이에 행민들은 그 공을 높이 찬양해 이곳에 공덕비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서기 1877년 관주에게 상소문을 올린바 관주로 하여금 만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고 이곳을 功德공덕동산이라 명칭 했다.’

금산공원에서 압축된 제주의 아기자기한 역사문화를 엿보고

이곳은 오래전 바닷가였다. 이곳에서 낚시하는 풍경이 영주십경인 산포조어이다.

2000년대 지어진 물사랑 홍보관곁에는 샘물인 지장깍이 있고 그 위에는 금산유허비(禁山遺墟碑)라 새긴 큰 바위가 놓여있다.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곳 금산은 제주성내와 산지포山地浦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많은 문화명소가 있던 유서 깊은 현장이다. 제주성 북성 문턱에서 곧바로 바다에 낭떠러지를 이루며 우뚝 뻗은 이 언덕에는 제주 특유의 난대림이 우거져 오랫동안 입산이 통제되면서 금산禁山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1877(고종 14)에는 이곳에 길이 뚫리면서 공덕동산이란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금산 일대는 금산과 더불어 샘, 연못, 하천,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수려한 산천 풍경을 이뤘으며 백조를 비롯해 많은 후조(候鳥)들이 날아들었고 태공들은 낚싯대를 들여놓고 시간 가는 줄을 잊었으며, 문인 선비들은 시회(詩會)와 주연을 베풀어 회포를 풀던 평화스러운 정경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영주십경의 하나로 꼽는 산포조어(山浦釣魚)는 바로 이 언덕에서 바로 보는 제주 앞바다의 수백 척 낚싯배가 밝힌 등불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룬 야경이었다.

이 일대는 1931년부터 시작된 제2차 제주항(濟州港) 축항공사로 매립되기 시작해 1955년에는 마침내 금산물 원천마저 매립돼 지금은 금산 수원지로 변하고 말았다. 참으로 아까운 제주도의 명소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에 제주시 건입동 유지들이 뜻을 모아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유서 깊은 문화의 현장을 길이 되새길 수 있도록 이곳에 비()를 세웠다.

금산공원 주변에는 한국전력공사에서 2016년 세운 표지석도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제주도 최초의 발전소 터 : 이곳은 1926421일 제주도에 처음으로 전깃불을 밝혔던 최초의 화력발전소 터이다. 이 발전소는 약 500여 호의 주택과 관공서에 정액등(定額燈) 전기를 공급하였던 곳으로 제주도 최초의 전기 발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