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여는 계절
서랍을 여는 계절
  • 고시연 기자
  • 승인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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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실 수필가

여름내 푸르던 나무숲이 휑해졌다. 열매를 떨구고 사위어가는 풀들. 그 위로 내려앉은 가을볕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목을 움츠리고 마당을 서성이다 한걸음에 방으로 들어왔다. 불현듯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서다.

자작나무 빛깔의 책상에 손을 얹고 의자에 앉았다. 딸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매일 앉았던 자리.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가버린 주인을 잃고, 책상은 홀로 방을 지키고 있다. 유치원 졸업 기념으로 찍은 정면의 사진 속에서, 사각모를 쓴 어린 딸과 눈 맞춤을 한다.

엄마.”

금방이라도 아이가 나를 부르며 달려 나올 것만 같다. 순간 내 품으로 살며시 다가와 머리를 파묻는 딸.‘와 닿는 아이의 풋풋한 냄새. 사랑의 향기에 취한다.

사진에서 눈을 돌리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구슬달린 레이스 지갑, 강아지 인형, 머리핀 상자, 필통, 후배들이 보낸 편지묶음, 다이어리, 벙어리장갑…….

서랍 속에서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달려 나오는 추억들. 마음의 귀가 열린다. 나는 이들과 함께 삼십대의 어느 한 시절로 돌아가 여행을 시작한다. 서랍 속에 침묵으로 누웠던 물건들이 하나, 둘 일어나 여행에 합류한다.

머리핀 상자부터 열었다. 주황, 분홍, 초록, 하늘색 꽃핀들. 나는 여섯 살 딸의 머리에 가르마를 타고, 열 개가 넘는 핀을 색깔별로, 양쪽머리에 촘촘히 끼운다. 알록달록 꽃밭을 머리에 인 아이가 꽃처럼 웃는다. 강아지 인형이 꼬리를 치며 아이 곁으로 달려온다. 아득한 풍경이다.

고이 접힌 사연을 간직한 봉투들. 겉봉에 깨알같이 쓰여진 발신인 이름위로 수줍고 앳된 얼굴들이 보인다. 지금은 어른이 되었을 그 소녀들은 어느 하늘 아래에 뿌리를 내렸을까? 모쪼록 행복하고 무탈하기를…… .

분홍색 필통을 열자, 열여섯 자루의 몽당연필과 두 자루의 색연필이 부동의 자세로 가지런히 누워있다. 작은 연필들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 놓은 마음이 정겹고 싸하다. 연필들은 아직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음인지, 20여 년 한자세로, 방금 깎인 듯 뾰족한 심을 지켜내고 있다. 늦은 밤 연필을 쥐고 책상에 앉은 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연필들은 주인과 함께 했던 노역勞役의 시간들을 오래 기억하리라.

머물고 싶은 시간

조그만 다이어리 겉면에 쓰여진 제목에 도무지 눈을 떼지 못한다. 첫 장을 넘기자 초등학교 때 써놓은 동시들이 올망졸망 펼쳐진다.

 

아이들이 풍선에 자기 꿈을 불어 넣으면

조그마한 풍선은 큰 꿈 주머니가 된다

그것이 하늘로 날아가 꿈을 채운다

 

천천히 장을 넘기자 중학교에 입학 했는지. 국어,수학,영어,사회,과학,한문,가정등 과목별 점검표와 함께 그려진 생활 계획표들…… .

다이어리를 접자,‘머물고 싶은 시간위로 서성이는 딸의 모습. 무수한 풍선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서랍을 닫았다.

 

상강이 지나며,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고 있다. 멀리 떨어진 자식들의 겨우살이가 마음 쓰이는 계절이다. 이부자리는 바뀌었는지, 감기는 안 걸렸는지 조바심 내다, 속수무책으로 서랍 속 아이들의 행장과 마주한다. 시간의 더께만큼 생각이 깊어진 물건들과 마주하면, 변두리로 밀렸던 기억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든다. 그때마다 울고 웃던 추억들이 자북히 솟아올라 나의 심연을 촉촉이 적신다. 오래된 나의 시간이 정지 되어있는 곳. 서랍 속은 시공을 초월한 마법의 만남 터이자 나의 안식처다.

씨를 다 떨구고 풍장처럼 바짝 마른 강아지풀이 찬바람에 흔들린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멀리 있는 자식의 안부가 궁금하여 서랍을 연다. 아니,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다 까닭도 없이 한기가 느껴질 때, 서둘러 서랍을 연다.

희끗해진 머리위로 하얀 겨울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