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물과 길의 혁명’ 주도…한라산 관통하는 5·16도로 개설
(112)‘물과 길의 혁명’ 주도…한라산 관통하는 5·16도로 개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영관, 상하수도 보급 사업 등 펼쳐
김영길, 제주지방법원장·변호사 활동
김영돈, 제주대 교수·향토 설화 집대성
김영락, 대과에 급제…후진 교육 힘써
김영린, 제주도의원·경찰청 총무과장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한라산을 가로질러 연결하는 5·16도로의 1960년대 초 모습. 5·16도로로 명명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과 함께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에 의해 시작된 최초의 대규모 도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영관 제주도지사는 제주도의 발전을 위해 5·16도로(한라산 횡단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한라산을 가로질러 연결하는 5·16도로의 1960년대 초 모습. 5·16도로로 명명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과 함께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에 의해 시작된 최초의 대규모 도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영관 제주도지사는 제주도의 발전을 위해 5·16도로(한라산 횡단도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영관金榮寬1925년생, 해군제독, 12대 제주도지사. 강화도 금화金化에서 태어나 1947년 해군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해군본부 작전국장과 인사국장을, 해군대학 총장을 거쳤다.

국방대학원 입교 중 19615·16 군사정변으로 각 시·도지사는 그 지역 육군예비사단장을 발령했으나 해군기지가 있던 제주도에는 해군제독을 발령했다.

도내 각급 행정기관에 제주계엄사무소 연락관을 배치, 군부가 완전히 장악된 상태에서 1961524일 김영관이 발령됐다.

김영관은 5·16도로 개설과 상하수도 보급사업 등 굵직한 계획으로 물과 길의 혁명을 펼치며 제주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김영관 이임 3년 뒤 5·16도로의 760고지에 김영관지사의 공적비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박정희 의장의 첫 방문은 98일이었다. 박의장은 중장 계급장을 단 군복차림으로 한번 꼭 오고 싶었던 곳을 생후 처음 밟게 되어 감회가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이후 1010일 심정굴착공사가 처음으로 애월면 수산水山리에서 착공했다.

196233일 제주대학이 국립으로 이관됐으며 또 324일 한라산 횡단도로 기공식이 있자 524일 박 의장이 두 번째의 제주 방문이 있었다.

이는 국립 송당목장 운영부실을 확인하고 당일 귀경, 민간불하를 지시했다.

그 후 김영관은 해군연합참모본부 군수계획국장, 진해鎭海 해군통제부 사령관, 함대사령관 등을 거쳐 중장으로 진급한 뒤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1969년 예편했다.

이후에 영남화학(비료) 사장과 주월대사駐越大使를 등을 지냈다.

김영길金榮吉1919(일제강점기)~1992, 법관. 제주지방법원장, 변호사. 본관은 김해이며 한림읍 귀덕리<->에서 김기봉金己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교토<京都>중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일본의 리스메이캉<立命館>대학 전문부 법과를 거쳐 동시에 동 대

학 법문학부 법과에 입학해 재학 중 19441월 일본군의 학병學兵으로 징발돼 육군 고사포高射砲학교를 마쳤다.

19458월 일본이 패전하자 귀향해 동년 11월 전남 미군정청에 의해 제주공립농업학교 교유로 출발했다.

1946제주도사법요원시험에 김태준金泰俊과 같이 합격, 동년 5월 제주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돼 법관이 됐다.

이후 그는 제주대학 강사로 법학을 담당해 가르치고 청주지법, 대전지법 등 각 법원의 판사와 부장판사를 거쳐 1961년 제주지방법원장으로 귀향, 1963년 대구고법 수석 부장판사를 지냈다.

1969년 법복을 벗고 대구에서 변호사를 개업해 제주 출신 문양文洋(도두) 변호사와 함께 명성을 날렸다.

그는 대구직할시 교육위원으로 활동했고, 녹조근정 훈장과 세계평화 문화인상을 받았다.

 

김영돈金榮墩1932(일제강점기)~2001, 민속학자, 대학 교수, 제주도민속학회장. 호 현지玄旨, 본관 김해, 산북 한림읍 귀덕리<->에서 아버지 김태희金泰喜와 어머니 현임아玄壬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 오현고등학교 교사로 출발해 196012월 제주대학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로 출발하면서 재능과 정력을 쏟아 학문연구에 몰입, 교수로 재임하면서 국어교육과장, 대학박물관장과 탐라문화연구소장 및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7년 제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후일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으로 제주도 민요의 수집과 연구와 제주 향토의 설화를 집대성하면서 구비口碑 문학에 대한 연구를 전국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뿐만 아니라 제주 해녀 연구에 관심을 쏟음과 동시에 세시풍속, 통과의례, 전승연희傳承演戱, 또 제주도민의 민간공예·석상·석구石具·제주도의 민가와 무형문화재 등 제주 향토민속 분야를 개척했다.

민속학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독특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면서 독창적인 탐색으로 연구를 심화시켰다.

19642월 제주도민속학회 창립에 참여, 회장이 되어 정기적으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는 한편 학술지를 펴내는 등 제주 민요, 제주 민속의 한국화와 세계화에 힘썼다.

그는 한국민속학회에 들어가 활발하게 활동, 동 학회의 이사에 취임하고 한국언어문학회 감사, 비교민속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김영락金英樂1789(정조13)~1859(철종10), 선비. 훈장. 본관은 나주. 자는 명래明來, 제주시 화북동<벨도> ‘거로-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김익겸金益兼의 아들이고 김영집金英集과 김영업金英業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유명한 오드싱-이다. 오도승방 정씨는 1742(영조18)에 제주시 오등동인 오도승 마을에서 태어나 거로마을 유생 김익겸의 아내가 되었다.

모진 역경 가운데 자식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쏟아 아들 김영집金英集·영업英業·영락 등을 향시鄕試에서 4명의 합격자 중에 나란히 들어가게 했다.

이들은 대과大科에 급제, 김영집은 예조정랑을 거쳐 강원도 회양군 은계찰방銀溪察訪을 역임했으며 김영업은 사헌부 장령을 거쳐 제주판관이 되었고 김영락은 후진 교육에 힘쓰며 문명을 떨쳤다.

유적지 표석세우기운동의 일환으로 200056일 제주시 우당도서관 입구에 현모양처인 오도승방 정씨와 동방급제한 아들들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김영린金永璘1910(일제강점기)~1976, 제주도의원, 본관은 경주, 제주시 아라동<아라위>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후에 제주도경찰청 총무과장을 지냈다. 김영린은 19525·10에 실시한 초대 제주도의회에 북제주 갑구에서 입후보해 자유당으로 당선됐다.

1952527일 제주도의회 특별분과위원회에서 김영린 의원 동의로 잔비殘匪완멸 대책을 입안해 28일 본회의에 상정했다.

먼저 무기명 투표로 송방식宋邦植, 고인도高仁道, 김영린, 차명택車明宅, 김옥현金玉賢, 김도준金道準, 허만필許萬弼, 김찬익金贊益 8의원을 특별위원을 선출했는 데 위원장에는 김옥현을 선출했다.

김영린은 1953년 제주농고 총동창회 회장에 당선되었으나 의원생활로 2년 뒤에 사임하고 탐라신문사 부사장, 자유당 제주도당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