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도성의 종루(鐘樓)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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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학, 제주대학교 지리교육전공 교수·박물관장/논설위원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서울의 종각에서는 새해맞이 타종행사를 한다. 송구영신의 의미를 담아 행해지는 타종 행사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이러한 제야의 타종 행사는 지방자치시대가 도래하면서 지방에서도 열리는데, 제주에서는 시청앞 광장에서 ‘용고타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그런데 서울처럼 종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용고’라는 커다란 북을 친다. 어찌하여 북이 종을 대신하게 되었을까?

제주에도 서울처럼 종루에 걸린 종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비롯한 중요한 도회지나 진영(鎭營)에 종을 매달아 종소리로 성문의 개폐를 알리게 했다. 밤 10시경에 종을 28번 쳐서 인정(人定)을 알리면 성문이 닫히면서 통행금지가 시작되고, 새벽 4시경인 오경삼점(五更三點)에 종을 33번 쳐서 파루(罷漏)를 알리면 성문이 열리면서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제주의 종루는 제주성이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주목 관아의 정문에 해당하는 외대문이 종루였는데 세종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다시 축조하여 진해루(鎭海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1699년 남지훈 목사는 종루를 개건(改建)하고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라는 현판으로 바꾸었다. 포정사는 원래 관찰사가 집무하던 감영을 말한다. 제주도가 멀리 떨어진 섬이라 제주목사가 관찰사의 임무를 대행했기 때문에 포정사라는 현판을 달 수 있었다. 여기의 누각에 옛 묘련사의 종을 구입하여 매달아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리게 했다. 이형상 목사가 1703년 제작한 ‘탐라순력도’에는 외대문의 문루에 종과 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탐라방영총람’에도 외대문에 종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1847년 이의식(李宜植) 목사는 종루에 있던 종이 금간 것을 핑계 삼아 이를 녹여 무기와 화로로 만들었다. 그 이듬해 부임한 장인식(張寅植) 목사는 역사가 오랜 탐라고도(耽羅古都)에 종이 없으면 안 된다 하여 만호(萬戶) 장석좌(張錫佐)를 시켜 전라도 영암 미황사에 있던 큰 종을 사들였다. 당시 900냥을 지불했고 무게는 500근으로 1690년 경상도 고성의 와룡산에 있는 궁흥사에서 만든 것이다. 규격은 길이가 2척, 둘레가 5척 3촌, 두께는 1촌 3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제주목 관아가 훼철되면서 이 종도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다.

최근 제주목 관아 복원 사업이 행해져 다른 건물과 함께 외대문인 진해루도 복원되어 탐라포정사라는 현판도 같이 걸어 놓았다. 제주목 관아 정문으로서의 위용은 어느 정도 갖추어진 셈이다. 그러나 2층 누각에는 북만 보관되어 있고 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종루의 기능은 복원되지 않은 것이다. 복원 사업이 단기간에 추진되다 보니 종을 복원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듯하다.

혹자는 그까짓 종 하나가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종이 걸려진 진해루는 박제된 경관에서 벗어나 하나의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 제야의 타종 행사뿐만 아니라 관덕정 광장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행사에 종을 활용함으로써 이 장소가 지니는 공유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 기왕에 십시일반 도민의 헌금으로 복원된 목관아의 전례를 본받아 모금을 통해 탐라도성의 종이 만들어진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관덕정 광장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탐라도성의 종소리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그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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