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관덕정 현판에 ‘탐라형승’이란 커다란 글씨 새겨
(113)관덕정 현판에 ‘탐라형승’이란 커다란 글씨 새겨
  • 박형준 기자
  • 승인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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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 재일교포 화가
김영삼, 제주대학교 교수…문총 제주도지부 창립
김영수, 제주목사…운주당·정원루 중수
김영조, 충남 천안 각원사 조성
김영업, 사헌부 장령·제주판관
김영진, 초대 남제주군수·2대 북제주군수
관덕정 안 창방보와 보 사이에 걸려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 글씨. 제주목사를 지냈던 김영수가 65세에 쓴 글씨이다.
관덕정 안 창방보와 보 사이에 걸려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 글씨. 제주목사를 지냈던 김영수가 65세에 쓴 글씨이다.

김영일金英日1937(일제강점기)~2012, 재일교포 화가. 어릴 때 약 2년간 한림리<-수풀>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김영일은 일제강점기에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생활했다.

후일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서 공부했으며 재일동포라는 한계를 극복克復하기 위한 수단으로 탈·가면假面을 작품 소재로 삼았다.

코리아 통일미술전, 송영옥宋英玉 화백과 2인전人展, 제주에서의 개인전 등을 통해 작품 세계를 알려왔다.

 

김영삼金永三1922(일제강점기)~1995, 시인. 제주대학 국문과 교수. 문총文總 제주도지부장. 평양 태생으로 1951년 단국대학 국문과를 졸업, ‘현대예술지 주간과 자유대한신문 주필을 거쳐 1954년 제주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처음으로 문총 제주도지부를 창립했다. 그는 초대 회장으로서 제주의 문화예술 행사를 일반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56617일 신성여고 강당에서 결성된 제주문학동호회는 제주대학 교수 김영삼을 회장에 선출했다. 그는 동년 펜클럽 회원으로 문인의 시야를 넓히더니 1957년 문총 기관지로 제주문화를 출간, 이듬해 경기대학 교수로 떠나서 이어 단국대·항공대·충북대 등에서 교수생활을 거쳤다.

제주에서 부인이 사별하자 인생의 허상과 실상에 침잠沈潛하면서 표현한 시집 아란의 불꽃을 발간했다.

1988년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의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만년에는 자신이 창설한 세계시연구소 소장으로 저술과 시작에 몰두했다.

또한 오월문학상·반공문학상·인도印度 M·M상과 미국 콜로라도주립대학에서 수여하는 세계우수작가상을 수상했다.

김영수金永綏1716(숙종42)~1786(정조10), 무신, 제주목사, 본관 안동, 자는 중약仲若, 1744(영조20) 무과급제, 1778(정조2) 남도 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동년 12, 황최언黃最彦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812월에 떠났다.

그가 재임하던 1780(정조4)에 주성에 두 문을 구축했다. 또 두 개의 성문을 세웠으니 남쪽은 소민문蘇民門이라 하고 북쪽은 수복문受福門이라 하였다. 또 광제교光霽橋를 가설하고 간월천看月川(벼릿내 또는 별도천)에 보를 쌓아 수해에 대비했다.

그리고 동문 밖에 있는 운주당運籌堂과 연무정演武亭(현 제동교濟東校)을 중수, 본디 이 정은 인조 때 신경호申景琥 목사가 창건한 것인데 숙종 20년에 이익태李益泰 목사가 동문 밖에 이설한 것으로 무사들의 습사처習射處였다.

남성문南城門에 있는 정원루定遠樓를 중수하고 또 남성문 서쪽에 있는 청풍대淸風坮를 노장대老將坮라고 제명했다.

관덕정 안 창방보와 보 사이에 걸려 있는 탐라형승耽羅形勝이란 대자大字는 그가 65세 시에 쓴 글씨이다.

그의 친필인 환선대喚仙臺라는 글씨와 그 옆에 절구絶句 한 수를 초서로 써 넣은 마애명이 현재 방선문 안쪽 바위에 남아 있다.

재일교포 김영조 공적비가 있는 제주시 도평동 비석거리.
재일교포 김영조 공적비가 있는 제주시 도평동 비석거리.

김영조金永祚1930년생(일제강점기), 재일교포, 사찰寺刹 창업주, 호는 각연覺然, 본관은 경주, 익화군益和군의 19세손, 애월읍과 제주읍의 경계에 20가구쯤 사는 사라-마을무수-의 서쪽은 광령리<광낭->, 동쪽은 도평리<벵듸>로 양분한다.

그는 어릴 때 이곳에서 서로 동서東西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누가 물으면 어떤 이는 광령 사람이라고 하고, 혹자가 물으면 도평都坪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김두만金斗萬과 어머니 고명월高明月 사이에서 태어나 불심의 힘을 믿어 15세에 단신으로 도쿄으로 가서 큰돈을 모았다.

33세에 어머니를 잃어 1975년 어머니 이름을 딴 명월사明月寺를 지어 도쿄 신도信徒에게 헌납했다.

한편 모은 돈으로 조국에 절을 지어 통일統一을 기원祈願하는 도장이 되도록 하고자 하는 큰 뜻을 두었다. 결국 그는 충청남도 천안시 태조산에 불사佛舍를 일으키려 해 남북통일南北統一 기원대불祈願大佛을 봉안할 호국 각원사조성을 시주했다.

김영업金英業1784(정조8)~1835(헌종1), 문신. 사헌부 장령, 제주판관. 제주도 화북촌 거로동에서 출생하고 자는 중수仲修이며 본관은 자주, 익겸益謙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동래 정씨 통덕랑通德郞 석규錫珪의 딸인데 아이들 교육에 힘써 오드싱-이라 불렸다.

김영업의 벼슬은 사헌부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그는 1834(순조34) 4, 이광영李光暎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835(헌종1) 6, 현직에 재임 중 사망했으니 그에 대한 선정비가 세워졌다.

김영진金榮珍1907년생, 초대 남제주군수, 본관은 경주, 제주시 이도동<제주-성안>에서 제주목濟州牧 주서主書 김남련金南鍊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광주농업학교 5년을 졸업했다.

일제 하에 관리로 재임 중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군정청에 의해 194681일 제주도濟州島가 도로 승격돼 초대 제주도지사로 박경훈朴景勳이 발령되고 초대 북제주군수 박명효朴明效, 초대 남제주군수 김영진金榮珍을 발령했다. 김영진은 동년 11월에 제2대 북제주군수로 전입하기에 이르렀다.

1947년 민전民戰이 주도하는 제주3·1시위사건으로 모든 공공기관이 총파업總罷業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제주군청은 이를 중지하니 미군정에서 김영진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했다.

312제주민생문제대책위원회위원으로 3·1사건 수습에 노력했다. 19505·30선거에 북제주 을구乙區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강창용姜昌瑢에게 고배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