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과 베풂의 상징’ 김만덕 자취를 따라 걷다
‘나눔과 베풂의 상징’ 김만덕 자취를 따라 걷다
  • 제주신보
  • 승인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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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공원·동자복 역사문화 명소 즐비…골목길 옛 감성·향수 자극
거상 김만덕 산지포구서 객주 사업…흉년 때마다 제주도민 구휼
산지천에 조천석 석상 세워…홍수 등 자연재해로부터 무사 기원
제주시 일도1동 동문시장 인근 산지천 남수각에 남아있는 성터의 흔적.
제주시 일도1동 동문시장 인근 산지천 남수각에 남아있는 성터의 흔적.

건입동은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전 재산을 바쳐 도민을 먹여 살렸던 의녀 김만덕을 기리는 김만덕 기념관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건입동 고우니모루에 잠들던 김만덕의 묘는 1977년 사라봉 모충사로 옮겨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만덕할망의 의로운 위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덕상을 시행하고 또한 객주집을 복원했으며, 현대식 만덕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내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산지천 인근 김만덕 기념관을 돌아보고 광제교 아래에 있는 아담한 석상인 조천석을 들여다본다.

 

동자복만수사에서 시간여행을 마치니

금산공원과 동자복 공원 주변에는 꼬옥 들려야 할 여러 역사문화 명소들이 즐비해 있다. 마을 단위에서 리립(里立)으로 건립한 박물관이 있는 곳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건입동에는 마을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금산공원 바로 남쪽 2층 건물이 건입동 마을박물관이다. 금산공원 뒤에는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이어져 있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제주에 피난 온 사람들이 일시 살던 곳이고 그 후 여러 사정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

우리는 지금도 피난시절 골목길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꼭 들려야 할 곳은 김만덕 기념관, 객주집과 산지천 그리고 동문시장일 것이다.

제주시 산지천 남수각 하늘길 벽화거리에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제주시 산지천 남수각 하늘길 벽화거리에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은혜로운 빛으로 다시 태어난 김만덕 할망

김만덕(1739~1812) 할망은 성안(일설에는 구좌읍 동복리인 골막)에서 김응열의 21녀의 딸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여 외숙 댁에 맡겨졌으나 10세 때 제주성안 무근성에 살던 퇴기 월중선에 의지하면서 기적에 올랐었다.

김만덕은 관기생활을 청산하고 봉옥, 복실 두딸을 데려 사는 고선흠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이내 남편이 병사했다.(독신으로 살았다는 설도 있음)

김만덕은 제주목 산지포구 근방에 물산객주(物産客主)집을 차리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미역, 전복, 양태, 우황, 진주 등을 서울로 보내고 도민이 필요한 물품들을 사들였다. 그는 수년 만에 만냥 부자가 되었다.

갑인년 가뭄이 있었던 1790~17945년간 부황증에 걸려 쓰러지는 도민이 부지기수였다. ‘갑인년 흉년에도 먹다 남은 것은 물뿐이었다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 인구 65000여 명이 해조류나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그는 전 재산을 내놓고 전국의 상인들과 양곡 등을 사들일 것을 계약했다.

보름 만에 200섬의 보리가 도착, 관덕정 앞뜰과 삼성혈 목에 가마솥 10여 개를 걸어놓고 죽을 쑤어 날마다 굶은 도민들을 먹였다. 이어 500섬의 보리와 감자를, 다음 해에도 수천석의 양곡으로 상당한 도민을 구휼했다.

제주목사 유사모는 김만덕의 자선 사업을 영의정 채제공에게 보고하니, 정조는 만민의 귀감이요, 청사에 빛날 선행이니 직접 만나 소원을 들어주겠다.’ 했다.

1629년 제주도에만 내린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라는 국법으로 여자는 한양에 갈 수 없으나, 정조의 어명으로 김만덕할망 만이 예외로 출륙금지령 속에서도 1796년 제주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궁중 예법에 위계 없는 사람은 성상 배알을 못하니 내의원의 의녀반수로 제수되어 입궁할 수 있었다.

회갑이 되어 김종주를 양손자로 삼고 74세로 일생을 마쳤다.

건입동 고우니모루에 잠들던 묘는 1977년 사라봉 모충사로 옮겨서 구휼의인 김만덕 기념탑과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제주도에서는 양성평등의 시대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만덕할망의 의로운 위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덕상을 시행하고 또한 객주집을 복원했으며, 현대식 만덕기념관을 건립해 국내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산지천 광제교 아래에 있는 조천석 석상.
산지천 광제교 아래에 있는 조천석 석상.

조천석(朝天石)과 경천암(敬天巖)

조천석은 산지천 광제교 아래에 있는 아담한 석상이다. 이곳에 있는 조천석 석상은 모조품이며 진품은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경천암은 조천석이 놓인 커다란 바위의 이름으로,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천석 앞면에는 朝天石, 뒷면에는 庚子春 牛山書(경자춘 우산서)라고 종서로 음각되었다.

진품에는 朝天石이라고 새겨져 있으나, 모조품에는 朝天 두 글자만 새겨 놓았다. 朝天은 하느님께 배알하다, 하늘에 조현한다는 뜻이다.

이원조 목사는 耽羅誌草本산저교가 동성 안에 있는데 김정 목사가 광제교라 이름을 개명하고 다리 위에 있는 지주암에 조천석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놓았다.’라고 기록했다. 광제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준말이다. 즉 비가 온 뒤에 부는 화창한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변의 고로(古老)들에 따르면, ‘옛날 산짓내가 자주 범람하여 성안 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타 지방에 있을 때 치수(治水)하는 방법을 알았던 어느 목민관이 이런 돌을 세워 정성껏 치제(致祭)도 하고 또 홍수가 염려되면 이곳에서 지우제(止雨祭)를 거행하니, 그 뒤부터 수재가 없어져 치정에 밝은 목사라고 전해지기도 했다.

김석익의 탐라기념 등에는 ‘1780(정조4) 목사 김영수에 대한 기록에 수재를 막기 위해 고을 안에 간성을 쌓아 두 문을 설치, 남쪽을 소민(蘇民), 북쪽을 수복(受福)이라 했다. 간월천(看月川)에도 보()를 쌓았다.’고 되어 있다.

예부터 치수하면 김영수 목사라 통칭할 만큼 알려져 있어 조천석의 제작자가 김영수 목사로 회자되고 있다.

산지천은 만조 때에는 밀물이 남수각까지 밀려들어갔다고 전해온다. 그럴 때에는 조금만 비가 와도 저지대는 물바다가 됐으며, 식수도 오염돼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천석을 세워 제를 지낸 뒤부터는 만조 때에도 조천석이 놓여 있는 곳 위로는 밀물이 올라가는 일이 없어졌다고 전해온다.

홍수가 날 때면 조천석이 물에 잠기는 정도에 따라 위험도를 측정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