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을 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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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 농업인·수필가

자배오름 자락 감귤원에, 가을이 깊어간다.

주저리주저리 황금빛 열매들을 보듬어 안고 있는 나무들이, 서늘한 하늬바람에 옷깃 여민다.

올해는 유독 없는 집 제삿날 돌아오듯빈번했던 태풍들에게 시달림이 많았었는데, 용케 견뎌내 일용할 양식을 선물해 준 나무들이 고맙고 대견스럽다.

그렇지만, 농부의 얼굴에 먹구름 자욱하다. 감귤가격에 대한 우울한 전망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귤 당도가 예년 같지 못하다.

설상가상 강풍과 비 날씨로 인한 상처와 흑점병으로, 태깔이 좋지 않은 열매들도 적지 않다.

때문에 진작부터 경매시장의 반응이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초반부터 바닥을 치며 생산비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락가가 속출했다.

곳간에서 인심나고, ‘유항산자유항심(有恒産者有恒心)’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 해 먹고 살기에도 빠듯할 감귤수입에, 한숨 깊어지고 부실한 다리 더욱 후들거린다.

그러나 어찌하랴.

가을의 막바지. 머지않아 눈 소식도 들려올 터인데 열매들을 나무에 그대로 두고 지켜볼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수확을 늦출수록 내년 해거리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한데,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다. 더욱이 명색이 농부라면, 애면글면 꽃을 피우고 열매들을 건사하느라 기력이 다해, 축 늘어진 자식 같은 나무들 수고를 덜어주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다.

노지 조생감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이 열매 수확이다.

한 알 한 알을 가위로 따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작업보다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수확시기가 한 달 전후로 몰리다 보니,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

이웃끼리 수눌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시집 간 딸부터 형제자매들까지 온 가족이 동원된다. 부지깽이도 누워 있을 틈이 없이 곤두서서 돌아다닐 정도의 농번기이다 보니, 마을엔 한 달 남짓 인적이 끊긴다.

형 부부만의 감귤수확이 안쓰러웠는지, 올해는 뜻밖에 서울 사는 동생이 내려 와 일손을 도와 주었다.

생전 처음 작업복 입은 동생 덕에,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장수처럼 힘이 났다. 며칠간, 아침 7시쯤부터 땅거미가 지는 저녁 5시까지 형제가 함께 더운 땀을 흘렸다.

손에 쥔 소득은 예년에 못 미쳐 마뜩찮았지만, 그래도 동생 덕분에 일찍 빨리 수확을 마쳐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했다. 그래서인가. 내년에도 도와드리겠다는 동생의 제안에 사양하지 않고 망설였던 것은, 형제애를 빙자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故所訴願)이 가슴에 똬리를 튼 넉살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겨울이 지척이다. 텅 빈 농장에는 일용할 양식을 잃은 직박구리들 울음소리 요란하고, 농부는 돋보기를 닦으며 희망이란 이름의 2020년 영농일지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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