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이 일군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길
선인들이 일군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길
  • 제주신보
  • 승인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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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 열어
한수풀은 한림의 옛 이름으로 널따란 숲 이라는 뜻
비양도 주변에 출몰하던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워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명월진성 전경
비양도 주변에 출몰하던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워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명월진성 전경

지난 동성(東城돌하르방길에 이어 이번호부터 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을 따라 걷는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한수풀은 한림의 옛 이름으로, 널따란 숲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한림읍에는 대림리, 월림리, 한림리, 상대림, 고림동 등 숲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무성한 숲은 사라졌다.

반면 선인들이 일군 역사·문화는 고스란히 남아, 이제나 저제나 후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한림중학교·한림여성농업인센터·질토래비가 협약을 맺어 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을 걷는다.

한림읍과 한수풀 사이에서

오래전 지금의 한림읍 지역은 석천촌인 귀덕, 선돌이 있는 입석촌, 반촌인 명월 등으로 이루어진 고을이었다. 신라 진흥왕 때 탐라에 515, 고려 숙종 때인 1105년 탐라가 군으로, 1153년에 군이 현으로 격하되었으며, 1300년에 현촌이 설치됐다.

명월현과 귀덕현의 출현은 1153년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조인 1416(태종 16) 제주 3읍을 개편할 당시에는 본읍에 속한 귀덕현과 함께 명월현이 되고, 1437(세종 19)경에 명월방호소가, 1510년 명월진성이 들어선다.

명월진성이 지어진 것은 비양도 주변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함이다.

명월진성 서쪽 경작지에서 무문토기편, 대팻날, 갈돌, 숫돌 등 석기시대의 유물이, 주호시대 유물인 곽지리적갈색토기, 돌도끼, 홈돌, 갈판 등이 출토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여겨진다.

이곳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유물이 모두 발견된 곳인 만큼, 관련 유물의 모조품이라도 전시하는 시설이 들어서기를 제안해 본다.

이형상 목사가 1702년 제작한 탐라순력도에는, 명월진성에서의 활쏘기 시합인 명월시사(明月試射), 군사들의 훈련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명월조점(明月操點), 비양도에 사슴을 방사하는 비양방록(飛揚放鹿)이 그려져 있다.

1608년에 현촌제를 폐하고 방리가 설치되자 명월은 우면 소재지가 되었고, 1877년에는 신우면, 구우면으로 분할되면서 구우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사무소는 풍헌시대에는 풍헌자택을, 면장제 시행으로 명월성 내의 사환곡창 일부를 사용하였으며, 1928년 옹포리에 설치되었던 면사무소는 1936년 한림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마을 북쪽에 선돌이 있어 입석촌(立石村)라 불렸던 선돌은 오늘날 대림리로 개칭되는데, 대림리는 곧 한수풀이란 뜻이다. 상대리는 상대림(上大林) 종고실의 준말이고, 중대림으로 불렸던 대림리가 예전의 선돌이다. 한림리와 수원리는 하대림, 조물케로 불렸다. 상대림, 중대림, 하대림이란 명칭으로 보아 이 일대는 모래바람을 막아 줄 곶자왈과 숲이 우거졌던 것으로 보인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행정리의 개편이 이루어지는데, 상대림은 상대리로, 중대림은 대림리로, 하대림 한수풀은 한림리로, 조물캐는 수원리로 불리게 된다.

한림읍에서 곧잘 불리고 있는 수류촌이란 지명이 생성된 과정을 돌아보자. 조선은 건국 이후 제주마를 키우기 위해 해발 200-600미터 사이에 10소장을 만들어 국유화 한다. 이에 따라 금악리 갯거리 오름 동쪽 소와리물 주변에 6소장이 들어선다. 이와 더불어 목축업을 위주로 하는 수류촌이 설촌되었는데 이것이 금악마을 형성 초기 모습이기도 하다. 한림읍 주변 마을에 남아있는 돌담밭을 수류천 돌담밭이라 칭하는 데서 보듯, 수류촌 역시 한림읍의 주변 마을을 상징하는 의미로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한수풀이란 지명은도 한수풀소년단, 한수풀도서관, 한수풀역사순례길 등의 이름에서 보듯 한림읍 지역을 포함하는 옛 이름인 셈이다.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 위치한 명월포 수전소와 최영 장군의 격전지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 위치한 명월포 수전소와 최영 장군의 격전지

삼별초군과 최영장군이 상륙한 명월포

지금의 한림읍 옹포리 포구는 옛날의 명월포로, 해상의 요충지이자 명월진성으로 가는 통로이고 관문이었다. 탐라가 원나라에 보내는 사신들도 이곳을 통해 오갔고, 삼별초의 이문경 별장과 김방경 장군의 부대도 명월포구로 상륙했다.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 전설과 한경면 고산리 차귀도 전설에 관련된 호종단도 이 포구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특히 1374(공민왕 23)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상륙하여 목호들을 진압하고 돌아간 곳도 이곳이다. 다음은 옹포리 포구에 세워진 표지석의 내용이다.

명월포 격전지 : 삼별초항쟁과 목호(牧胡)의 난 때 상륙전을 치른 전적지. 1270(원종 11) 11월 이문경 장군은 삼별초의 선봉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 고려관군을 무찔러 승리함으로써 처음으로 제주를 점거하게 되었다. 그 뒤 1374(공민왕 23) 8월 최영 장군이 314척의 전선에 25천의 대군을 이끌고 상륙, 몽고의 목호 3천기()를 무찌른 격전의 땅이다.

즉위 과정에서 원나라의 도움을 받은 고려 원종은, 1270년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고, 환도를 반대하는 삼별초를 해산한다. 그러자 배중손 등은 삼별초군과 반몽(反蒙)세력을 규합하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정부조직까지 갖추고는, 15천여 명을 이끌고 봉기하여 진도에 용장성을 쌓고 항전에 들어간다. 이에 고려관군은 진도를 공격하는 한편, 삼별초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12709월 고여림 장군과 김수 영광부사 등을 제주도에 보내어 환해장성을 쌓고 지키도록 한다. 이 소식을 접한 삼별초는 별장 이문경을 제주로 보내 정부군을 격퇴하도록 한다. 명월포로 상륙한 이문경은 관군과 치열한 접전(아래의 동제원 전투 참고)을 벌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제주에 삼별초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현재 오현고등학교 정문에서 동쪽으로 10m 지점에 있는 동제원 전투에 관련된 표지석 내용은 아래와 같다.

동제원(東濟院) 전적지(戰迹地)

이곳은 삼별초와 고려관군이 결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1270(원종 11) 명월포로 상륙해 온 이문경 장군의 삼별초를 맞아 고려관군은 이 동제원에 주진지를 구축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고여림 장군과 김수 영광부사 등이 전사하고 관군은 전멸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삼별초는 제주도를 점거하고 2년여에 걸쳐 여원연합군(여몽연합군)과 항쟁을 벌였다.

그 후 1271년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 온과 대장 배중손이 사망하는 등 진도정부가 붕괴되자, 김통정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에 상륙, 애월읍 고성리에 토성을 쌓고 항전에 나섰다. 관군은 삼별초를 회유했으나, 삼별초군은 사신을 죽이는 등 강력히 저항했다. 12731월 원의 세조가 정온·홍다구 등에게 탐라를 정벌하도록 명함에 따라, 3월에 몽고군 6,000명과 김방경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 6,000명 등 12천여 명의 여몽연합군이 3군으로 나뉘어 명월포, 귀일포, 함덕포로 상륙했다. 3일간의 접전 끝에 삼별초가 항복하고, 김통정 장군의 자결로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삼별초 항쟁이 막을 내린 이후 제주는 약 100년 동안 몽골의 탐라총관부 설치로 직할 식민지 시대를 맞아야 했다. 목호 수천 명이 제주 여인들과 통혼하여 새로운 가족형태를 낳기도 했던 상황에서, 고려는 제주에 관리를 보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탐라의 목호들은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1356년 조정에서 파견된 도순문사 윤시우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세 차례나 목호가 고려관리들을 살해하자, 공민왕은 1366100척의 군선을 파견하여 목호들을 굴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원나라가 멸망(1369)한 이후인 1374(공민왕 23)년 명나라가 탐라마() 2천 필을 요구하자, 이에 공민왕은 다시 목호정벌에 나서야 했다. 목호의 반란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제주가 명에 복속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민왕의 명을 받은 최영 장군은 25,605명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라고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3개월여의 치열한 전투 후에 목호의 난은 평정되었다.

한수풀역사순례길의 출발지인 명월포인 옹포는, 지금은 조그만 어촌 포구로서 한가로운 풍경이지만, 위에서 보듯 삼별초·여몽연합군·고려의 목호토벌군이 상륙한 고려시대의 중요한 격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