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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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논설위원

당시 어린 내가 봐도 그 과수원은 입구부터 달라 보였다. 주말이나 방학 때만 반짝 관리하는 선생네 과수원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격이 다른 ‘귤나무관리의 교과서’ 같았다. 그날 일제 전정가위를 허리에 차고 그 과수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던 전문가님 말씀의 요지는 ‘가지치기’였다. 그분은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면서도 연신 가지를 보며 쉴 새 없이 나무를 다듬으셨다.

가지치기는 과수원에서 가지를 솎아주거나 잘라주는 전정(剪定)과 과일 재배에서 수형(樹形)형성을 위해 가지를 자르는 전지(剪枝)가 있다. 포도와 달리 감귤류는 크게 전정하지 않고 가볍게 전정한다. 그러다가 수령(樹齡)이 많아짐에 따라 강하게 전정해야 한다. 나무도 나이가 들면 수세(樹勢)가 약해져 열매가 불량(속칭 꼬다마)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자라난 가을 순과 탱자나무 가지가 무성했던 감귤 밭주인인 아버지는 그분에게 우리 과수원 전정을 부탁드렸고 ‘그래 주마’ 확답 받은 다음에야 돌아왔다. 예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선진(?) 과수원에 요즘 말로 벤치마킹 갔을 때 기억이다.

나무만이 아니다. 사람도 자신의 내면과 주변을 가지치기할 필요가 있다. 마음과 인간관계의 가지치기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잡다한 생각들과 수상한 감정들이 뒤엉켜 생겨난다. 종일 생각이 맑지 못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어지러울 때가 많다. 삶이 다사다난한 탓이다. 명쾌하면서 심플하게 정리하고 싶지만 온갖 복잡한 변수 때문에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선각자들은 ‘제멋대로 자란 근심 걱정의 잔가지를 용기 있게 잘라내라’고 조언한다. 잔가지를 쳐내야 나무가 잘 자라듯 쓸데없는 잡념을 지워야 새로운 생각이 자랄 공간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그대로 두면 마냥 약해지지만 자주 가지치기하면 우리들 마음도 ‘4번 타자 멘탈’로 바뀔 수 있다.

인간관계 역시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살면서 늘어나는 얽히고설킨 관계가 때로 엄청난 스트레스다. 많은 관계를 만들지만 어느 순간 자신은 없고 의무만 남아 관계 속에서 소외되고 피곤함만 남는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진실한 사람과 참된 인연을 잘 식별하는 것이 먼저다. 그게 어렵다면 살면서 자주 인간관계를 가지치기해야 한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가 몇 개 되는지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대부분 1000개가 넘었고 많은 학생은 3400개나 된다고 했다. 다시 물어봤다. 그러면 그중 지난 일 년 내 주고받은 전화번호가 몇 개 되는지를. 대부분 50개 미만이었다. 옥스퍼드대학 로빈 던바 연구에 의하면 한 사람이 유지할 수 있는 정상적인 1차 그룹 크기는 약 150명이다. 원시부족끼리 싸울 때 가장 효과적인 전투를 치를 수 있는 크기가 150명이고 육군 중대 규모도 대략 150명이다.

양적으로만 팽창하는 인간관계를 가지치기하지 않으면 진정한 관계는 오히려 느슨해진다. 수많은 관계에 다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챙겨야 할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소홀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무분별한 양적 확대를 자제하고 비우며 솎아내는 ‘관계의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잘라내면 죽는 가지가 아니라 새로 잎이 나는 뿌리줄기”, 조경을 전공하는 아들이 그 중요성을 함축한다. 겨울은 나무의 가지치기 계절이다. 사람에게는 올해 업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지금이 적기(適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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