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든다
스며든다
  • 제주신보
  • 승인 201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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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정 수필가

옆집에서 전화가 왔다.

각재기 줄까요?

냉큼 달려가서 이웃 부부가 갓 낚아온 각재기 열 마리를 챙겨왔다. 방파제에서 건져 올린 각재기는 겨우 한 뼘 남짓이다. 아직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각재기를 손질하여 가스 불에 올린다. 여기에 청양고추 두어 개 뚝뚝 부러뜨려 넣고 된장을 풀고 애기배추 한 줌과 마늘, 소금을 넣으면 뚝딱, 국물이 시원한 각재기국이 완성된다.

처음 제주에 와서 각재기국이니 접짝뼈국이니 이런 음식메뉴를 보고 호기심이 동하여 먹어보았으나 입맛에 영 맞질 않았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옆집에서 나눠주겠다는 각재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구워도 보고 간장에 졸여도 보았지만 맛이 신통치 않아 며칠 냉장고에 모셔두었다가 슬그머니 쓰레기통에 내다버렸다. 각재기가 우리 고향에서는아지로 불린다는 것, 정식 명칭은 각재기도 아지도 아닌 전갱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고향에선 오동통한 전갱이에 왕소금을 뿌려 구워먹거나 조림을 해서 먹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국을 끓여볼 생각은 못했다.

옆집에서 두 번째 각재기 배급이 있던 날, 차마 싫다는 말은 못하겠고 해서 딱 세 마리만 달라고 했다. 마침 그곳에 있던 토박이 제주분이, 국을 끓이면 얼마나 맛있는데요,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제주식 각재기 국 끓이는 법을 전수해주었다. 설명대로 조리를 해봤더니 이럴 수가, 정말 맛있다. 두 끼 째 데워 먹어도 비린내도 안 났다. 무엇보다 조리법이 쉬워서 좋았다.

처음 제주살이를 시작하면서 입맛에 맞았던 음식을 꼽는다면 빙떡과 쉰다리, 자리젓 이 세 가지였다. 가장 즐겨 먹었던 음식은 된장 자리물회였던 것 같다. 텁텁한 된장 맛이 나는 물회를 먹을 때마다 육지에서 먹던 새큼달큼 감칠맛 나는 초고추장 들어간 물회를 그리워했다.

그런데 이게 웬 조화인가. 두 해째 된장 물회를 먹다가 육지에 가서 그토록 먹고 싶었던 육지표 물회를 먹었다. 어라, 감칠맛은 어딜 갔는지 달달하고 느끼하기만 하다. 되레 구수하면서 담백하고 우직한 맛인 된장 물회가 그리웠다.

입맛이란 길들여진다. 나는 사람들이 음식 호불호를 이야기하면 이렇게 장담한다. 세 번만 먹어봐라. 그럼 맛있어진다니까.

외국에 잠시 머물 때 그곳 지인이 최고로 맛있는 베트남국수집을 찾았다며 나를 데려갔다. 미국식 베트남국수는 양도 어마어마했지만 국수 위에 얹힌 고수의 양도 엄청났다. 고수를 난생 처음 맛본 나에게 고수 맛은 실수로 노린재를 씹은 듯 역했다. 이런 것이 맛있다는 지인에게 화가 났을 정도로. 그런데 신기하다. 이런저런 기회로 딱 세 번을 먹어보니 그 고수 때문에 베트남국수가 자꾸 생각났다.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는 나의 입맛에 잘 맞았다. 이후론 자주 먹어본 음식은 다 맛있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고수가 가장 좋아하는 향신채소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요즘도 베트남국수를 주문할 때면, 고수 많이 주세요, 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콩잎 쌈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이곳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었다. 마침 어느 식당에서 콩잎이 상에 올랐을 때 하나 집어 먹어보았다. 잎인데도 질기고 왈칵 생콩비린내가 났다. 제주에선 먹을 게 귀하다보니 콩잎까지 먹었구나, 딱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신기하게도 콩잎도 세 번 째는 고소하고 감칠맛이 났다. 돼지고기두루치기를 콩잎에 돌돌 감아 먹어보니 무덤덤한 맛에 풋내 나는 상추보다 확실히 더 맛있었다.

태풍 전에 따다 놓은 골이 깊고 잘 생긴 늙은 호박 세 덩이가 고민이었다. 예전 같으면 호박떡이나 호박범벅, 호박죽으로 소비되었으련만. 요즘은 달고 단단하며 호박특유의 노린내도 나지 않는 개량호박인 단호박이 있어 재래종 늙은 호박은 우리집에선 겨우 내내 관상용으로 장식장 위에 놓였다가 봄 되면 버려지기 일쑤였다.

어느 모임에서 내 늙은 호박이 쓸모없다는 얘기를 했더니 어떤 분이 깜짝 놀란다. 그 좋은 호박을 버리다니 무슨 소리냐며 호박무침이나 호박된장국에 쓰란다. 호박은 무르기 쉬우니 깍뚝깍뚝 썰고, 양파 좀 넣고 된장을 풀면 호박된장국 완성. 또 새로운 맛의 지평이 열리겠구나. 내친 김에 콩 조각이 둥둥 뜨는 제주된장도 구입하기로 한다.

그렇다. 분명코 나는 이 섬에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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