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교육에 남다른 열정...4·3 이재민 구제에 힘써
(116)교육에 남다른 열정...4·3 이재민 구제에 힘써
  • 제주신보
  • 승인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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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김용하
조선 후기 문신 김용, 고향에 돌아와 서당훈장으로  유명
조선 후기 서예가 김용징, 향교 교수 두루 거치며 훈학 전념
항일운동가 김용찬, 조국 광복 위해 조천만세운동 ‘참가’ 
제4대 제주도지사 김용하, 혼란했던 제주 정상화 위해 노력
재일교표 교육자 김용해, 재일본 제주도친목회장 등 역임
제4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우당 김용하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설립해 제주시에 기증한 우당도서관. 사진은 개관 초기 우당도서관의 모습. 사진=제주시 제공
제4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우당 김용하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설립해 제주시에 기증한 우당도서관. 사진은 개관 초기 우당도서관의 모습. 사진=제주시 제공

김용金墉1744(영조20)~1783(정조7), 문신. 성균관 전적, 본관은 경주 국조방목에는 본관이 김해.

대정현 신도<->에서 김오정金五鼎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1(정조5) 전 응교 박천형朴天衡이 제주순무안사시재어사巡撫按査試才御史로 내도해 문·무과를 시취하고 이듬해 정월에 제주유생 시권을 과차科次해 김용金墉, 변경우邊景祐, 강성익康聖翊 3명을 합격시켜,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했다.

1783년 임금이 임석하는 특별 전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은 예조좌랑·전릉령典陵令 등을 거쳤다.

친상을 당해 귀향, 훈학에 몰입했다. 한때 제주시 용강<무드->에서 초빙되고, 서당훈장으로 유명했다.

김용징 비(애월읍 납읍리 마을 안).
김용징 비(애월읍 납읍리 마을 안).

김용징金龍徵1809(순조9)~1890(고종27), 한학자, 서예가.

사림의 영수領袖. 자는 운경雲卿, 호는 정헌靜軒, 본관은 김해, 애월읍 납읍리<과납>에서 김봉철金鳳喆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2(순조32) 전주의 승보시에 합격하고, 1838(헌종4)에 제주의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184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성균진사가 되었다.

도내의 제주·정의·대정 등 3개 향교의 교수를 두루 거치면서 훈학에 전념, 글씨도 잘 써서 1854(철종5) 제주목사 목인배睦仁培가 제주향교 구내에 계성사啓聖祠를 창건하니 그가 제액을 게시했다.

당대 많은 문하생이 배출돼 흔히 권흥유생勸興儒生하고 진기유풍振起儒風이라고 평하고 또 박학선서博學善書로 사림의 영수라고 지칭하기를 인색하지 않았다.

그의 제주 관계의 칠언율시 700편은 한시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마을 사람 김성호金性昊1859(철종10)에 사마시에 합격해 김용징을 큰 진사, 김성호를 작은 진사라고 불리었다.

김용찬金容燦1884(고종21)~?,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항일활동.

호적상에는 김용찬金容粲으로 표기. 본관은 김해, 김화균金華均의 아들로 산북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이는 시위 주동자들의 대부분이 김시우金時宇의 직방계直傍系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의 기일을 택함으로써 그들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년 4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항소하자 동년 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됐다.

김용하金容河1896(건양1)~1950(납북), 교육자, 4대 제주도지사.

6·25에 서울에서 납북. 자 달우達宇, 호 우당愚堂, 본관 광산, 애월읍 하귀리<귀일>의 김상수金庠洙(제주향교 직원)의 장남이다.

평양의 제2고보高普를 거쳐 도쿄의 법정法政대학 예과와 19303월 경성京城제국대학 제2회 법문학부 철학과를, 1949421일 제4대 제주도지사에 부임했다. 194911153개의 도지사가 경질되면서 그는 불과 7개월 만에 도백에서 물러섰다.

서울 장충동獎忠洞 자택에서 6·25로 북한군에 의해 한 아들과 함께 납북됐다.

교육부장관을 지낸 김덕중金德中과 전국경제인협회 회장이던 김우중金宇中은 그의 아들이다. 아들 김우중은 제주우당愚堂도서관을 건립해 제주도에 헌납, 이는 충남 서산 장지葬地에서 김황수金黃洙 종친회장의 간청한 바를 실천한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건너가 그 후 함경북도 종성鍾城중학교의 교사로 출발해 대구大邱사범학교 교유로 오래 재임한 바 있다.

조국이 해방되자 서울 상대의 교수, 문교부 장학관으로 발탁돼 남녀공학을 처음으로 주장, 경성京城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대)와 용산龍山공립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한때 청년운동에 뜻을 두어 조선민족청년단(단장 이범석李範奭) 서울시단市團의 이사로 있다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및 학생과장에 임명됐다.

한편, 김용하는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과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로 승진된 바도 있다. 특히 문교부 장학관으로 재임 중 한글 습자책을 처음 발간해 습자 교과서의 역할을 하게 했다.

제주도지사에 부임한 후 도정 방침을 첫째 치안유지, 둘째 민생구호救護로 정했으니 이는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본도의 4·3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년 만에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북청년단의 발호跋扈에 쐐기를 박았다. 김용하 지사는 부임하자마자 계장급係長級 이상 전 직원에 대해 사표를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관의 기강을 새롭게 세우기 위한 인사쇄신책이자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재임 중 4·3 이재민 구제와 제주·정의·대정 향교를 새로 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김용해金容海1926(일제강점기)~?, 재일교포 교육자, 민단 오사카<大阪>부 지방본부 문교부장 겸 사무국 부국장.

제주시 이호1<->에서 태어나, 대판시 생야구 승산북번지, 대판상업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판시립 기다츠루하시<北鶴橋>소학교 민족학급 담당 강사, 재일본 제주도친목회 회장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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