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와 제주도 일제로부터 언제 공식 해방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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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C&C 국토개발행정연구소 소장/논설위원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의 역사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변함없이 울릉도는 한반도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했던 시기에도 울릉도 주민이 고려 조정에 입조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울릉도와 독도가 자주 등장한다. 여말선초에 왜구의 노략으로 피해가 커지자 15세기 초 태종은 주민 피해를 우려해 육지에 나와 살도록 하는 쇄환정책을 실시하였다. 세종 때도 몇 차례나 주민 이주정책을 실시하면서 두 섬을 순견(巡見)케 하였다. 당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당시 조선의 통치를 명확케 보여주는 사료로서 조선이 쇄환정책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 두 섬을 모두 여전히 조선의 통치하에 두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통치력이 많이 약화돼 있던 조선은 군사를 울릉도로 보내 정세를 살폈다. 이는 동해안 어민의 쇄환과 울릉도가 자국의 땅임을 확인코자 한 중앙정부의 순심정책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숙종 때는 어부 안용복이 고기를 잡기 위해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된 사건이 일어났고, 안용복은 당대 최고 실권자인 ‘에도 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자산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서계를 받았다. 하지만 곧 대마도주에게 빼앗기고 ‘월경죄인’으로 감금당한 후에 풀려난 안용복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명백히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조선은 1895년 도감제(島監制)를 실시하여 울릉도를 행정 관할지역으로 정했다. 울릉도 인구가 1899년 당시 2000명에 이르자, 조선은1900년 10월 25일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했다. 그 관할구역을 관보로 수록함으로써 법적 효력을 갖게 했다.

하지만 당시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인들이 상당수 들어와서 느티나무를 도벌해 가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이는 당시 조선의 힘이 일본인의 침투에 대해 무능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것이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독도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결정해 버렸다. 뒤늦게 조선은 그 사실을 알고 반박해 봤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해 국제적으로 항의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속수무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일제가 조선과 조일어업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조선어민들은 까다로운 허가절차를 거쳐야 했고, 연안어장을 고스란히 일본어민에게 내줘야만 했다.

일제 강점기사료 중 독도에 대한 언급은 일본해군성수로부에서 만든 일본수로지에서다. 1910년 합방 이전의 조선수로지와 그 이후의 일본수로지에서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1946년1월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는 지령 제677호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가 일본영토에서 제외된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어 6월 22일 동 지령 제1033호에서는 일본 영역을 더욱 분명히 규정하면서,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령하고 있다.

이로써 특히 울릉도 및 그 부속도서가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영토임을 명백히 인정받게 됐다. 그럼에도 일본은 1952년 이후부터 독도를 울릉도로부터 분리해 일본영토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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