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에 ‘무죄’…“恨 못 풀고 잇따라 눈 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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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 생존인 18명 중 3명 별세…살 날이 많지 않아

제주4·3은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수형인에 대한 배·보상과 명예회복은 누락됐다. 미완의 4·3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 행방불명 수형인들이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두 가지다.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받거나 불법 군사재판을 ‘일괄 무효’로 하는 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이다. 본지는 4·3특별법 개정안의 조속한 통과를 위해 굴곡진 삶과 운명을 감당해야 했던 생존 수형인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내란죄 등 이념의 굴레를 씌우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해안에서 5㎞ 떨어진 중산간 마을마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됐다.

4·3의 광풍 속 제주에서는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 군사재판이 열렸다.

10대 소년, 젖먹이를 둔 아낙네, 글을 쓸 몰랐던 농부에게도 내란죄 또는 이적죄라는 죄명이 씌워졌다. 당시 제주에는 교도소가 없어서 징역형을 받은 도민들은 전국 형무소에 수감됐다.

1999년 발견된 수형인 명부(2530명)에 따르면 사형 384명, 무기징역 305명, 나머지 1841명은 징역 1~20년을 선고받았다.

수형인 대다수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집단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기소장, 공판조서, 판결문도 없이 2530명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증언에 따르면 1948년 12월 관덕정 광장과 인근 창고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중령과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 3명이 20여 명씩 이름을 부르고 나서 “고등군법 제77조 내란죄를 지었다”고 선고했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항변할 기회도 없었다. 형무소에 가서야 죄명과 형량을 알려줬다. 교도관들은 “형량도 모른 채 여기는 왜 왔느냐”고 나무랐다.

수형인 중 현재 생존자는 27명(0.01%)에 불과하다.

생존 수형인의 평균 나이는 아흔 살 이른다. 살날이 멀지 않았다. 재심 청구로 18명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중 3명은 지난해 통한의 세월을 뒤로 한 채 눈을 감았다.

▲생존자들의 기구한 삶과 운명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출신인 양일화씨(91)는 기구했던 삶을 살았다.

양씨는 16살 당시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로 ‘폭도’로 몰려 경찰에 끌려가 수없이 맞고 고문을 당했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형무소 문이 열렸다.

양씨는 인민군에 끌려가 지리산에서 숨어 지내다 국군에 생포됐다.

양씨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징집영장이 나오면서 이번에는 4년 3개월 동안 국군 장병으로 복무했다.

박내은씨(89·여)는 22살 당시 표선면 가시리에 살던 중 무장대가 쌀을 달라고 해서 쌀 한 됫박을 줬다.

토벌대와 무장대 양쪽 모두 양민을 감시하고 억압했다. 박씨는 서귀포경찰서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했다.

2살 난 아들과 함께 전주형무소에서 1년간 수형생활을 했다. 죽만 먹이다보니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려 설사를 했다. 그래도 아이는 살아났다. 형무소 안에서 죄수복을 만들었고, 미싱 작업대 밑에 아이를 두고 키웠다.

오계춘씨(95·여)는 서귀포시 서홍동에 살다가 이유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갔다. 당시 10개월 된 아들을 안고 유치장에 수감됐다.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배를 타고 제주항에서 목포로 가던 중 아이는 굶어 죽었다.

목포항에 도착한 후 경찰관은 아이를 묻어준다고 했지만 제대로 묻었는지 확인도 못한 채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정기성씨(95)는 남원읍 신례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7살 당시 위미초등학교 교사인 형이 산으로 도피하면서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혀 위미지서에 끌려갔다. 이곳에서 탈출한 그는 산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자수했다.

정씨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과 수모를 겪은 후 군사재판을 받았다. 배와 열차를 타고 마포형무소에 이송된 후에야 무기징역을 받은 것을 알았다.

이곳은 중형을 선고받은 제주도민 202명이 수감됐다. 6·25전쟁 발발 후 형무소 옥문이 열렸다.

양씨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 의용군에 입대하지 않고, 걸어서 목포로 내려갔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군부대 노무자로 일했던 정씨는 1954년 고향으로 가서 자수를 했지만, 사법당국은 형무소를 탈옥했다며 그를 목포형무소에 재수감했다.

모범 수형인으로 징역 20년에서 15년으로 감형됐지만, 형무소에 끌려간 지 16년이 지난 1965년에야 석방됐다.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출신인 앙근방씨(87)는 1948년 중산간 소개령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토벌대와 무장대가 서로 왜 죽이는지 알지 못했던 소년은 동굴에서 주민 30여 명과 살다가 함덕에 있는 헌병대로 찾아 가 자수했다.

‘폭도 가족’으로 몰려 7년형을 받고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다. 6·25전쟁이 발발, 형무소 문이 열리자 한 달을 걸어서 대전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했다.

1956년 공사장을 전전하던 그는 경찰의 검문에 걸려 목포형무소에 재수감됐다. 1962년 특사로 석방돼서야 형무소 생활을 마쳤다. 16살 소년은 30살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18명의 수형인은 다음과 같다.

▲故 김경인(87세 작고·여·징역 1년) ▲故 김순화(87세 작고·여·징역 1년) ▲김평국(90세·여·징역 1년) ▲박내은(89세·여·징역 1년) ▲박동수(89세·징역 7년) ▲박순석(92·여·징역 3년) ▲부원휴(91세·징역 1년) ▲앙근방(87·징역 7년) ▲양일화(91·징역 5년) ▲오계춘(95·여·징역 1년) ▲오영종(90·징역 15년) ▲오희춘(87·여·징역 1년) ▲임창의(99·여·징역 1년) ▲정기성(98·무기징역) ▲조병태(91·징역 1년) ▲한신화(98·여·징역 1년) ▲현우룡(95·징역 15년) ▲故 현창용(87세 작고·징역 5년)

 


 

<인터뷰>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

18명의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를 이끌어 낸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당시 수형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불문곡직(不問曲直)’이라고 말했다. 72년 전 군사재판 당시 이들의 죄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따지지도 않은 채 형량을 선고했기 때문이다.

양 대표는 “많은 양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나 군부대에 끌려가 매를 엄청 맞았고, 다음에는 고문을 당했다”며 “이 같은 불법 체포와 불법 감금, 고문을 당한 사실로 인해 재심이 개시됐다”고 말했다.

양 대표는 “4·3당시에도 구형법(형사소송법)이 있었지만 군사재판은 기소와 피고인 신문, 증거조사 등 정상적인 재판절차를 진행하지 않아서 수형인들은 무죄를 선고받게 됐다”고 강조했다.

양 대표는 이어 “이번 재심사건 진행 과정에서 검찰은 재심 개시 결정과 본안 소송, 형사보상금 청구 소송에서 단 한 번도 항소를 하지 않았다”며 “기소장이나 공판조서 등 재판기록이 없어서 항소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는 했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기록이 없는 이번 재심은 판례에도 없는 사건인데다 수형인을 상대로 한 재판이어서 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1월 수형인과 가족 등 36명이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에 대해 양 대표는 “제주공립농업학교 축산과 5학년에 재학했던 부원휴씨는 억울한 옥살이로 수의사 꿈을 이루지 못했다”며 “수형인들은 고문을 당하고 전과자로 낙인찍혔고, 그 자녀들은 연좌제로 취업을 못하는 등 대를 이어 피해를 당하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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