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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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논설위원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나눈다. 이때의 복은 행운을 뜻한다.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마음과도 같다. 아예 ‘부자 되세요’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횡재를 했다고 행복해지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정작 우리가 바라는 것은 행복이다. 행복은 우리 삶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빈 그릇 속에 담아 넣고 싶은 것들의 대명사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하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이상은 2020년이 되어 100세의 상수(上壽)에 이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백년을 살아 온 새해 인사다. ‘남는 것은 사랑이 있는 고생뿐이다. 죽을 때까지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면…’이라고 여운을 남기는 노학자는, ‘새해에도 생명이 다하도록 사랑하며 살겠노라’ 하신다.

새해에 98세가 되신 어머니는 지난밤에도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온 방안에 불이 붙었는데 세상모르게 잠들어버린 딸을 살리려고 몸부림을 치신 것. 어쩐지 한기가 느껴져서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이불 위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축축하다. 괜찮으냐고 물으니, 얼른 내 얼굴을 감싸 안으신다. ‘아고, 우리 정옥이가 살아 있구나!’ 상황을 보니, 어머니는 실내등의 불빛을 화재로 오인해 전기장판의 코드를 뽑고, 흩어진 물건들을 치우고, 옷가지로 불을 끄느라 난리를 치르신 것이다. 가끔 발동하는 어머니의 치매는 순전히 딸의 안위와 관련된 사랑의 고생들이다. 간혹은 파도에 휩쓸려 간 딸을 살리려고 바다에 몸을 던져 밤새도록 사투를 벌이기도 하시니까.

그래서일까? 아침이면 어머니는 다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행복해진다. 요양원 주간보호로 가는 길, 도로 표지판과 상점 간판을 큰 소리로 읽는 사이에 마냥 즐거워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성산포’라고 읽으면, 내가 더 큰 소리로 성산포를 따라 한다. ‘철물점, 동홍동, 토평교회…’를 부르면서 신바람이 난 어머니는, ‘오라방 몰래 야학에 가서 한글을 깨쳤는데, 그것이 인생의 행운이었다’고 자랑하신다. 사실 어머니의 문해(文解)는 치매의 터널을 지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정신이 캄캄해 올 때면, 어머니는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이나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 같은 찬송을 소리 내어 읽는다. 손가락으로 가사를 짚어가면서.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머릿속에 환하게 불이 켜진단다.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를 운영하는 최인철 교수의 평가에 의하면 2019년에는 우리들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근육이 수축되면 몸이 아프듯, 의식이 수축되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수축된 근육을 확장시키기 위해 몸을 스트레칭 하듯이, 수축된 의식을 확장시키려면 정신을 스트레칭 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행복해지므로.

12월 31일 기준, 대한민국 안녕지수는 49점이다. 누적 평균 52점 대비 최저치다. 우울·짜증·불안함 때문에 행복지수가 많이 떨어졌다. 제주도는 세종시 다음으로 도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노인자살률은 전국에서 최고다. 한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장수의 섬에 드리워진 그늘이 아닌가.

새해다. 김형석 교수의 고백처럼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게 노년이라면 책을 읽으며 지식을 넓혀가야 하리라. 제주의 노년기가 배움을 통해 자아를 찾는 행복의 길이 되기를 기도한다. 조식 호나 믿엉 살아 온 제주도 어버이들의 평생교육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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