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안서 급제자 4명 배출…가문 번창
한 집안서 급제자 4명 배출…가문 번창
  • 제주신보
  • 승인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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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형제 급제 제주명문 광산김씨
대 이은 급제자 배출 부러움 받아
온 가족 매달려 전폭 지원 다반사
김계륭·계창 형제, 1672년 급제
사촌 김계흥·계중도 연이어 등과
중앙 진출 노력…유림 영수 존경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내에 있는 귤림서원 전경. 귤림서원은 제사기능을 가진 충암묘(沖菴廟)와 교육기능을 가진 장수당(藏修堂)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다. 충암묘는 1578년(선조 11) 제주판관 조인후가 충암 김정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묘이고, 장수당은 1658년(효종 9) 제주목사 이회가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드려 세운 강당이다.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내에 있는 귤림서원 전경. 귤림서원은 제사기능을 가진 충암묘(沖菴廟)와 교육기능을 가진 장수당(藏修堂)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다. 

고려 광종대에 시작된 과거제도는 거의 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시행됐다. 현대의 각종 고시는 과거 시험에 비하면 역사가 매우 짧다. 과거제도는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하고 진기한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가 기록된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순흥안씨는 안향(安珦)1260(고려 원종 1) 급제한 이후 조선조까지 11대 연속으로 급제자를 배출했다. 여흥민씨 가문은 1597(선조 30) 민기(閔機)에서부터 1880(고종 17) 민영일(閔泳一)까지 10대에 걸쳐 급제자를 배출했다. 대를 이은 직계 급제자가 이 정도이니, 방계까지 합치면 급제자는 더 증가할 것이다. 이 가문들은 대대로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샀을 것이다.

과거 급제는 개인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급제자가 속한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다. 따라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기 위해 온 가족이 평생 매달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로 인해 아들을 많이 둔 집안은 가문이 나서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강원도 원주에 원해굉(元海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관이 원주인데 이 사람의 아들 6형제가 인조에서 현종대를 거치면서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오늘날로 치면 6형제가 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경상도 안동 사람 김대현(金大賢)이라는 사람은 본인도 생원시에 급제했지만 광해군대에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사육신 중의 한 명으로 알려진 박팽년(朴彭年)도 본인을 포함한 4형제가 문과에 급제했다. 더욱 놀라운 기록들도 있는데 한양에 살던 조운기(趙雲紀)라는 사람의 아들 3형제는 1800(정조 24) 별시 문과에서 같은 날 급제했다. 오늘날이면 언론에 대서특필 되고도 남을 진기록이고, 부모에게는 자식 교육 방법과 관련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을 것이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진기록은 제주도에도 있었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소외되고 바다라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도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제주인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고 이들의 치열한 노력과 도전은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다음의 기록을 보자.

“1672(현종 13)에는 별시 문과에서 유명천 등 21명을 선발하고 추가로 제주 사람 김계륭(金繼隆)과 김계창(金繼敞)을 선발하였다.” 

“1676(숙종 2)에는 별시 문과를 베풀어서 오시만 등 일곱 사람을 뽑고, 제주 사람 김계흥(金繼興), 고기종(高起宗) 두 사람을 추가로 합격시켰다.”

조정에서 문과 급제자를 선발하면서 특별히 제주 출신을 추가로 선발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1672년에 같이 급제한 김계륭과 김계창은 형제였고, 4년 후 급제한 김계흥은 이 둘과는 사촌이었다. 이들의 급제 기록이 자세하게 정리된 국조문과방목을 보면 본관이 광산으로 되어 있다.

‘국조방목’의 김계륭 형제 급제 기록. 장서각 소장.
‘국조방목’의 김계륭 형제 급제 기록. 장서각 소장.

이들로 인해 제주에 사는 광산김씨 집안에는 매우 큰 경사가 이어졌을 것이다. 광산김씨의 제주 입도 시조는 김윤조(金胤祖)로 알려지는데 개성에서 출생해 고려조에서 예부의랑을 지냈다고 한다. 김윤조는 공민왕 때 친형 김흥조(金興祖)가 김정(金精) 등과 함께 정치를 전횡하는 신돈을 제거하려다 죽임을 당하자,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1368(공민왕 17)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에 들어와 은거하면서 제주 광산김씨 문중을 열었다고 한다. 광산김씨 문중은 이후 대대로 제주에서 살면서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그리고 조선 중기 김진용(金晉鎔) 대에 이르러 제주 지역민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원래 제주민들은 섬이라는 지역적 한계로 인해 중앙 정계의 분위기와 학풍을 배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명도암(明道菴) 김진용에게 기회가 왔다. 광해군대에 인목대비 폐위 반대 상소를 올리다가 제주에 귀양 온 이익(李瀷, 1579~1624)을 만나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집안이 학문으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김진용의 호 명도암은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의 지명을 따라 붙인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오현단도 그가 제자들을 교육한 장수당에서 출발한 것이니 제주 학문의 큰 흐름을 그가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학문을 바탕으로 광산김문은 조선 시대에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가문의 번창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얼마나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가 였다.

‘영조실록’의 김계중 급제 기록
‘영조실록’의 김계중 급제 기록

김계륭은 바로 이 김진용의 아들이다. 4촌을 포함한 연이은 급제는 제주에 사는 광산김씨 집안에는 매우 큰 경사였을 것이다. 숙종조에 김계흥은 감찰을 지냈고 김계창은 전적을 지냈다. 그리고 김계륭은 승문원교감, 벽사찰방 등을 지냈고 제주 유림의 영수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기록을 더 보자.

“1739(영조 15)에는 별시 문과를 치르고 제주도 사람 김계중(金繼重) 4명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김계중은 6품으로 벼슬을 올려 주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제주라는) 먼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늙었기 때문에 우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제주 출신 급제자 중, 김계중은 앞서 급제한 김계흥의 동생이었다. 결과적으로 사촌 관계인 4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김계중은 1663년생이니 77세에 급제한 것이다. 왜 이렇게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했을까. 다른 형제들에 뒤져서는 안되겠다는 오기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원래 이 집안의 학문적 풍토가 인재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일까? 조선 시대 과거급제자들을 보면 70이 넘은 나이에 급제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오늘날에도 고시 합격을 위해 젊음을 바치는 고시 낭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평생을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나이에 문과에 응시해 급제할 정도였으니 의지의 제주인이라 할 수 있다

이때로부터 약 백여 년이 흐른 182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유(金柔)라는 분이 있다. ‘국조방목에는 본관이 광산으로 되어 있는데 이전에 급제한 분들과 어떤 혈연관계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제주에 정착한 광산김문의 한 분파인듯하다. 이러한 분들의 노력과 열정이 오늘의 광산김문과 제주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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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창진(梁彰珍)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