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국경 넘나들며 조국 독립 위해 목숨 걸었다
(118)국경 넘나들며 조국 독립 위해 목숨 걸었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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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무신 김우추, 제2차 여진정벌 대승리 이끌어
김우평, 교사 신분 일본 국체 논리 전개…징역 1년 옥고
조선 후기 문신 김운, 1747년 박인보 후임 정의현감 부임
김운배, 조천 만세운동·군자금 모금 등 항일 활동 펼쳐
항일활동가 김운제, ‘미국의 소리’ 청취·소련 망명 기도
김원영, 도 천주교 첫 선교사로 제주지역 선교 활동 힘 써
제주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의 본토 공격에 대비해 구축한 진지동굴이 많이 남아있다.이들 진지는 한라산과 오름, 해안가 등에 구축됐다. 1980년대 찍은 이 사진은 성산 서쪽 암벽을 뚫고구축된 해안진지다. 지금은 무속인들의 기도처나 해녀들의 작업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의 본토 공격에 대비해 구축한 진지동굴이 많이 남아있다.이들 진지는 한라산과 오름, 해안가 등에 구축됐다. 1980년대 찍은 이 사진은 성산 서쪽 암벽을 뚫고구축된 해안진지다. 지금은 무속인들의 기도처나 해녀들의 작업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우추金遇秋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본관 고성固城, 김양金陽의 후손, 전라도 동복 태생. 자 여성汝成, 호 이우재二憂齋. 벼슬은 부승지에 이르렀다.

1570(선조3) 2, 이팽련李彭連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725월에 파직됐다.

1583(선조16) 이탕개泥蕩介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女眞族(=胡人)이 반란을 일으키자 북병사北兵使 이제신李濟臣이 이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이때 이제신이 보낸 장사將士 김우추가 용감하게 적의 소굴을 쳐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1588114일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과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 등은 병력을 이끌고 제2차 여진정벌에 가세해 대승리를 이끌었다.

김우평金宇平1917(일제강점기)~?, 청주공립사범학교 교사 시절 항일활동.

중문면 월평리<-벵듸>에서 태어나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읍 문덕동에서 살았다.

청주공립사범학교 교유敎諭의 신분으로 19429월 일본 국체의 논리를 전개한 사실이 탄로돼 당국에 검거됐다. 19421110일 대전大田지방법원에서 징역 14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운金運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1747(영조23) 4, 박인보朴寅輔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487월 나거拿去됐다.

조천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조천만세동산에 세워진 기념탑.
조천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조천만세동산에 세워진 기념탑.

김운배金沄培1899(광무3)~1934(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군 자금 모금 등 항일활동. 가명 김제민金濟民, 호적상은 김신배金申培. 호 해강海岡,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墨洞>에서 김희수金熙穗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 김희경金熙慶에게 입양됐다.

19193월 조천 만세운동에 가담한 후 동지들이 체포되자 부산으로 탈출해 19202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박은식朴殷植, 김창숙金昌淑, 손영직孫永稷 등의 지도를 받아 독립운동에 종사하면서, 과 손두 사람에게 국내에 잠입해 임정 군자금 모금 협조 요청 편지를 손종현孫宗鉉 등에게 전달하라는 밀령을 받았다.

문서를 숨겨 중국 상해에서 야하다마루<八幡丸> 선편으로 출발해 일본 고베로 상륙한 뒤 오사카를 경유해 192012월 부산 영도로 입국했다.

이후 동지 문봉기(조천)와 함께 업무 수행을 하던 중 체포됐다.

192162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해 이해 8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역시 징역 4년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운제金雲濟생몰년 미상, 제주무선소에서 단파 방송 미국의 소리청취에 따른 항일 활동. 제주읍 성내 출신.

19447월 일본군이 사이판도에서 전멸되고 8월에 프랑스 파리의 독일군이 항복해 전세는 완전히 연합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사는 교민들에 의해서 단파를 통해 조국의 동포를 격려하는 미국의 소리방송이 전달됐다.

제주에서는 군용 비행장이 건설되고 일본군 75천명이 들어와 진지를 구축하면서 미국과의 일전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489일 밤 독서회 회원 김운제金雲濟와 김귀석金貴錫, 김상희金相熙 등은 제북교 북쪽에 위치한 무선통신소에 근무하던 무선 기사 오기윤吳基允을 찾아갔다.

오기윤이 단파 라디오의 다이얼을 맞춘 곳은 미국의 소리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일본이 패전에 다다랐다는 내용을 전하며 조국의 동포들에게 용기를 안겨주는 격려의 방송이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은 김운제와 김귀석은 함북으로 건너가 소련 땅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기로 했다.

이들 외에 고영수高榮洙, 김용수金瑢洙, 윤한구尹漢求 등은 19441022일 수신소의 뒷담 벽을 넘어 오기윤 기사의 도움으로 미국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김원영金元永1869(고종6)~1936(일제강점기), 천주교 신부神父, 제주도 천주교의 첫 선교사.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o). 충청남도 공주公州 출생.

김원영은 1882년 이내수李迺秀와 함께 이 신학교로 유학, 1892년 돌아왔다. 그후 용산龍山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쳤다.

1899년 종현성당鍾峴聖堂(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주교 뮈텔(Mutel閔德孝)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고 프랑스의 빼이네 배(Peynet裵嘉祿) 신부와 함께 제주도로 건너왔다.

김 신부는성안의 한질골<大路洞>에 포교소를 마련, 10개월 동안 애써 5명의 신도를 확보했다. 190096일에 김 신부는 정의旌義 땅 한논, 서홍西烘리에 정착해 전교를 시작했다. 1901년 초에는 영세자가 50, 예비신자가 4백 명으로 급증했다.

1901(신축년) 당시 구마슬 신부는 산북에서, 김원영 신부는 산남을 맡아 전도활동을 했다. 김 신부는 별도로 치안 조직을 만들어 부당한 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는 자는 직접 처벌했다.

그 뒤 김 신부는 황해도 봉산鳳山, 함경남도 안변安邊 등 여러 곳에서 전교에 힘썼고, 1904년에는 경기도 행주幸州 천주교회의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성당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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