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자연서 만나는 제주지역 교육의 요람
천혜의 자연서 만나는 제주지역 교육의 요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문헌상 나타난 제주 사학의 효시
향교 이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고종 초까지 지방교육 중심 역할
개량서당·보통학교 개편 이어져
오늘날의 한림초등학교 발상지
한림읍 명월리 하천변에 위치한 명월대(明月臺)는 옛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팽나무 군락에 뒤덮여 있는 사진의 명월교는 복원 전의 모습이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한림읍 명월리 하천변에 위치한 명월대(明月臺)는 옛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팽나무 군락에 뒤덮여 있는 사진의 명월교는 복원 전의 모습이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월계정사는 문헌상에 나타난 제주 사학의 효시이다. 서원·서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학의 하나인 정사는 명망이 높은 선비나 관직에서 퇴임한 사람들이 고향이나 풍광이 좋은 곳에 만든 사설 교육기관이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기행은 월계정사를 살펴보고 한림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월계 진좌수 설화를 알아본다.

월계정사의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월계정사의 옛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월계정사(月溪精舍)와 우학당(右學堂)

1530(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학교조에는 월계정사가 예전의 명월현에 있고, 김녕정사는 예전의 김녕현에 있었다. 제주에서는 월계정사로 서재(西齋)를 삼고, 김녕정사로 동재(東齋)를 삼아 (제주)향교의 유생을 나누어 각각 사는 곳에서 가까운 정사에 나아가 글을 읽게 했고, 지방인사 중에 학식과 인망이 있는 자를 선택해 학장(學長)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1653(효종 4)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 월계정사가 명월성 서쪽, 김녕정사는 김녕포구 위에 있었음이 기록돼 있다. 월계정사가 최초로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간행시기는 1530년이다. 이런 이유로 월계정사는 조선 초기 향교에 이어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여겨진다. 월계정사는 1831(순조 31) 개량서당 교육기관인 우학당(右學堂)으로 전승됐다.

한림초등학교 발상지인 동명리 2177번지 일대는 우학당의 재실(齋室)과 명월진 서별장의 터전이다. 우학당은 1831(순조 31)에 설립된 지방 교육기관이다. 일제 초기인 1914년에 4년제의 개량서당인 보명의숙(普明義塾)이 임창현 구우면장에 의해 개설됐고, 1921년 사립 구우(舊右) 보통학교로 개편됐다.

이어 192391일 공립학교 인가를 받아 초대 교장 이화옥에 의해 운영됐고, 193346년제로 개편됐다. 이후 1934720일 지금의 부지로 이설됐다.

1935년 구우면이 한림읍으로 이름이 바뀌자 같은 해 425일 한림보통학교로 개명됐다. 1936년 부설신창분교장이, 다음 해에는 부설금악간이학교가 개설되면서 오늘의 한림초등학교로 이어졌다.

월계정사와 우학당은 현재 옛터만 남아 있다. 명월진성을 에워싼 조물과 강상이물이 만나는 계곡 건너 서북쪽에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 설치됐던 교육기관 중 관학은 삼읍 향교가 있었고 사학은 학당, 서원, 서당 등이 있었다. 그중 학당은 명월, 김녕 두 정사가 시초이다. 이들은 서재, 동재로 불리기도 했다.

서재인 명월정사는 월계정사로 알려졌는데, 순조 31년인 1831년에 우학당으로 이름이 바뀌어 고종 초에 폐지될 때까지 지방 유생들의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학제의 변천에 따라 1914년에 수업연한 4년의 개량서당인 보명의숙이 명월 성내 서재실옥에 설립돼 운영되다가 1921년 사립 구우면 보통학교로 개칭되고 이어 1923년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가 설립 인가됐다. 구우공립보통학교는 명월리에서 개교해 10여년이 지난 1934년 현 위치로 이전됐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문수동 마을 인근에 있는 진국태의 무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문수동 마을 인근에 있는 진국태의 무덤

월계 진좌수 설화

한림지역에서는 월계라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 월계정사와 월계천 그리고 도로명 월계로, 특히 월계 진좌수의 전설도 그 중 하나이다.

한림읍 명월리에 의술이 뛰어난 진국태란 사람이 살았다. 호는 월계이다.

어린시절 진국태가 서당에서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가에 있던 숲이 사라진 자리에 큰 기와집들이 생겨나는 게 아닌가.

방마다 불이 환하게 커져 있고, 사랑방 문이 열려있는 집을 진국태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예쁜 처녀가 진국태에게 손짓을 했다.

어느새 처녀는 다정히 진국태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며 나하고 구슬놀이를 하자.’하고는, 예쁜 오색구슬을 입에 물고 굴리고 있었다.

진국태는 구슬을 굴리는 처녀의 입술이 너무 예뻐서 정신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입안에서 굴리던 구슬을 진국태의 입에 넣어주었다. 진국태는 예쁜 처녀와 노는 것이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즐거웠다.

그 후에도 진국태는 서당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기와집 사랑방에서 처녀와 구슬놀이를 하곤 했다. 진국태는 글공부도 싫어지고 모든 일에 싫증이 났다. 진국태의 훈장은 이를 눈치 채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훈장은 진국태의 이야기를 듣더니 무릎을 쳤다.

너는 여우에게 홀린 거야. 다시 그 기와집에서 처녀가 구슬을 입으로 넘겨주거든 몇 번 굴리는 척하다가 꿀꺽 삼켜버리고, 그 즉시 하늘을 쳐다본 다음 땅을 보고 사람을 보거라. 명심해야 한다.’

그날도 처녀와 구슬놀이를 하던 중 그에게 구슬이 왔을 때 꿀꺽 삼켜버렸다. 그 순간 기와집이 사라지더니, 처녀는 꼬리가 아흔아홉 개 달린 여우로 변해서 그에게 달려드는 게 아닌가.

진국태는 겁이 나 사람 살려하고 외치고는, 하늘과 땅을 볼 겨를도 없이 내달렸다. 숨어있던 훈장이 나타나서 몽둥이로 내려치자 여우가 도망쳐 버렸다.

훈장이 하라는 대로 했는지 묻자, 진국태는 너무 겁이 나 하늘과 땅을 보는 것은 잊어버리고 살려줄 사람만 찾다보니 선생님만 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쉽구나. 하늘과 땅을 보았더라면 세상 이치를 다 통달했을 텐데, 사람만 보았다니 자네는 의술만은 통달하겠네. 내일부터 서당에 오지 않아도 좋네. 내 가르칠 것은 전부 가르쳐 주었으니.’

당시 한양에서는 영조 임금이 등창병이 나서 팔도의 명의들을 불러들였다. 진국태의 명성을 익히 아는 전라 감사가 그를 추천했다. 가난한 진국태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궁중에 들어갔다. 진국태는 곧 방문을 내어, 집 처마에 있는 거미집과 거미 일곱 마리를 잡아 찧어서영조의 등에 붙였다. 3일이 지나 영조의 등창병이 완쾌됐다. 영조 임금은 그의 의술을 높이 칭찬하고 궁중에서 벼슬을 하라고 하였으나, 진국태는 사양하고 귀향하려 하자, 임금께서는 본인이 그렇게 사양하니 할 수 없구나. 좌수 직함이라도 내려라.’ 하고 하명하였다. 그래서 이후부터 진 좌수가 된 것이다. 좌수는 조선시대 지방 자치기구인 향청의 우두머리다.

의술이 신의 경지에 이른 진 좌수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려운 사람과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