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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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지난해, 세밑이 눈에 들어올 즈음 일이다. 평소처럼 조천만세동산을 걷고 있었다. 입구 쪽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무심코 눈이 갔다. 걸린 곳이 바깥쪽이라 안에서 보니 한 낱말에 괴이한 받침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을 봐도 이상하다. 길가에 내건 게시물인데 맞춤법 오류는 말이 안되는 것이고, 내가 잘못 보고 있나 싶어 몇 걸음 걸어가 정면에서 들여다봤다.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제주항일기념관 ‘톺아보기’,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기념관을 보다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본다’는 취지를 담고 있음이 구체적으로 들어왔다.

‘톺아보기’에 야릇한 가역반응이 나타났다. ‘아니, 대중에게 알리는 말에 내가 모르는 낱말이 있다니.’ 선뜻 잘못된 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상 앞 중사전을 열었더니 올라 있다. 기본형 ‘톺다’가 실려 있다. ‘샅샅이 뒤지면서 찾다’ 예문까지 제시해 놓았다. ‘며칠을 두고 톺아도 오리무중이다.’ 놀랐다. 사전이 수택으로 가맣고 닳고 해져 너덜대는데도 현수막에 적힐 만큼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을 모르고 있었다. 수십 년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쳐 온 명색 국어선생 체면이 말이 아니다. 국어연구원 국어표준대사전에서 예문 하나를 더 만났다. ‘좀 더 차근차근하게 상배의 아래위를 톺아보며 밤마다 공동묘지에 숨어들어야 될 셈속을 들춰 보기로 했다.’(이문구, 장한몽)

검색해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을 열었더니, 어원이며 생성과정까지 상세히 풀어 놓고 있었다. ‘톺아보다’는 ‘톺다’에서 파생된 갈린 말이었다. ‘톺다’는 원래 삼을 삼을 적에 짼 삼의 껍질 따위의 거칠고 고르지 못한 부분을 날이 작고 고른 톱으로 쭉쭉 훑어내어, 가늘고 고른 섬유질만 남게 하는 것이다. ‘톱하다’의 어간에서 ‘ㅂ’과 ‘ㅎ’이 ‘ㅍ’으로 합성돼 ‘톱질하다’가 ‘톺다’로 전성된 것임을 알게 됐다.

연전, 동인지에 순우리말로 수필 한 편을 올린 적이 있다. 한자어까지 배제하려니 쉽지 않은 시도였다. 그럼에도 ‘톺아보기’와 반면식도 없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고 해가 바뀐 지금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한자어를 많이 쓴다. 순우리말만 아니라 한자어도 국어다. 하지만 한자어를 더한층 품격 있는 것으로 보는 인식은 문제다. 까딱하다 현학(衒學) 취미로 오해 받을 수도 있으니.

1930년대 순수시파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는 시가 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아름다운 시다. 티 하나만 내려도 흠결이 될 만큼 완미(完美)하다. 순연한 우리말이 햇발처럼, 일렁이는 물결처럼, 살랑대는 훈풍처럼 운율을 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톺아봐도’ 한자어라곤 그림자도 없다. 순우리말의 미감은 한자어라고 결코 따르지 못한다.

간혹 순우리말로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 시는 가능할지 모르나 줄글인 수필은 걸음걸음 걸리적거리고 막힌다. 당장, 요일과 열두 달을 일컫는 말이 없다. 무궁화와 심리학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나. 그렇게 우겨넣을 일은 아니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순우리말을 쓰려는 노력은 필요한 것이고 소중하다. 말 곧 그 민족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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