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 공장, 日帝가 제주를 식민지 교두보 삼은 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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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천주교 맞선 민란 발생
대정군 관노 이재수, 항쟁 선봉
신도 300여 명 살해…교수형
옹포리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
태평양 전쟁 시 군납용 생산해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 위치했던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의 흔적. 공장 부지는 2000년 이전까지 사무실 목조 건물과 29m 높이의 굴뚝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 위치했던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의 흔적. 공장 부지는 2000년 이전까지 사무실 목조 건물과 29m 높이의 굴뚝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1901년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천주교도의 행패에 맞서 이재수와 오대현이 이끈 민란으로 300여 명이 숨진 사건인 이재수의 난’. 당시 대정군의 관노였던 이재수는 천주교도들의 명월진성 습격 사건을 계기로 항쟁의 장두(狀頭)로 나섰다.

이번 질토래비 역사문화 기행에서는 명월진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이재수의 난을 알아보고 제주4·3연구소 역사기행(만벵듸 가는 길)을 참고해 한림여성농업인센터에서 발행한 교재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한림면 4·3역사 기행길에 나선다.

이재수의 난과 명월성

1901년 대정현의 유지와 유림으로 구성된 상무사는 각종 세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회(民會)를 개최하고 그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제주읍성을 방문하려고 했다.

오대현과 강우백이 중심이 된 민회는 대정을 출발해 제주읍성을 향하다가 명월진성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회세력은 비무장이었고 평화적으로 세폐(歲幣) 시정을 요구하려 했다.

그런데 19015월 프랑스 선교사의 지휘 아래 명월진성에 온 천주교도 800여 명은 민회소의 주민들에게 발포하고 장두 오대현 등 6명을 납치해갔다. 이런 명월진성 습격으로 민회 편에 더 많은 민중들이 결집하게 되고 무력항쟁으로 변화해 갔다.

이재수가 항쟁의 장두로 나서게 된 것도 명월성의 기습사건이 계기가 됐다. 항쟁의 주도권이 토호에서 민중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때부터 장두가 된 이재수의 비타협적 투쟁노선은 이전과는 다른 항쟁의 양상을 띠었다. 신축민란인 이재수의 난은 이곳 명월진성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이재수(1877-1901)는 대정군의 관노(官奴)였다. 당시 제주사회에서는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인 강봉언의 남세(濫稅) 즉 세금을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것과, 이와 결탁한 천주교의 작폐가 심했다.

민군의 장두가 된 이재수는 천주교의 응징에 앞장섰다. 제주성을 둘러싼 민군과 주성(州城) 안의 천주교 신도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성안에서는 부녀자 중심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반대 궐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성 밖에서는 은신 중인 천주교 신도들이 민군 측에 의해 살해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이 입성한 후, 관덕정 앞에서 삼백여 명의 신도가 살해됐다. 이 사건은 프랑스 함대와 일본 군함까지 출동하는 국제문제로 비화됐다.

결국 정부 진압군에 의해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되고 주민들은 사후대책을 보장받음으로써 난은 진압됐다.

이재수는 고등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해된 신도의 매장문제는 프랑스와 협상 끝에 화북동 지경의 황사평 천주교 묘지를 획정해 줌으로써 일단락됐다.

1901년 5월 제주 민중들의 저항인 이재수(李在守)의 난이 일어났다. 사진은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 장소인 아부오름 굼부리 모습.
1901년 5월 제주 민중들의 저항인 이재수(李在守)의 난이 일어났다. 사진은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 장소인 아부오름 굼부리 모습.

일제 강점기의 한림

1920년대부터 포구를 끼고 있는 한림리가 발전하면서 한림면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1919년 조직된 상해 임시정부의 비밀요원이면서 김구 주석의 경위실장이었던 문덕홍은 한림읍 옹포리 출신이다. 제주판관과 대정현감을 두 번이나 지낸 채구석도 이 고장 출신이다.

금악 출신인 박주석(박명수)는 증산교의 한 분파인 선도교(仙道敎)의 제주 수령이었다. 박주석은 법정사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해 일제로부터 7년형을 선고받아 수감 중 옥사, 독립유공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 외에도 옹포리는 이익우, 고운선, 김태안 등 독립운동가들도 배출했다.

이익우는 일제를 상대로 당차게 싸우는 모습으로 영리하고 바른말 잘하는 청년으로 알려져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 후 이익우는 광주에서 활동하며 19466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재정부장으로 선출됐다.

일제시대 한림항 주변에는 대규모 축산가공 통조림 공장이 들어서고, 면화판매소, 제빙공장, 전분공장 등이 세워지고, 옹포리에는 다케나카(竹中) 통조림 공장이 있어서 한림면 지역주민들이 노동자로 입사하기도 했다.

한림읍 옹포리에 있는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은 일제가 제주를 식민지 교두보로 삼은 증표라 할 수 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이곳을 군수 공장으로 전환해 쇠고기 통조림을 생산했다. 8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주야로 교대하면서 군납용 통조림을 생산했다고 한다.

19462월 이 공장은 적산(敵産)으로 불하돼 대동식품공업사가 인수했다.(‘제주신문’, 2013213일자). 공장 부지는 2000년 이전까지 사무실 목조 건물과 29m 높이의 굴뚝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한림에서의 군수물자 이송 과정에 미군의 해상봉쇄작전으로 인해 일본군 전력에 영향을 미쳤다.

1945414일 일본 해방함 제31호와 능미호가 미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고, 513일에는 비양도 근해에서 일본군함 4척과 수송선 1척이 미군의 잠수함과 B29기의 공격으로 격침됐다.

이 날 일본군 800여 명이 숨졌다. 한림면 사람들은 비양도 앞 바다에서의 폭발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해방 후 한림의 시대 상황

해방 후 한림면에는 19459월 중순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결성됐다. 마을마다 청년회, 자위대 등 자생적 조직을 기반으로 당시의 한림국민학교에서 200~300명이 모인 가운데 건준위원장 김현국이 추대됐다. 이어서 9월 말까지 이() 단위 건준도 조직되면서 위원장은 마을에서 존경을 받거나 신망이 컸던 유지들로 자연스럽게 추대됐다.

얼마 없어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나 참여 구성원은 거의 변동이 없었다. 인민위원회 결성식도 194510월 경 한림국민학교에서 있었다.

한림면 인민위원장은 고운선이 추대됐다. 한림면 인민위원회의 구성원들은 일제시대 한수풀 소년단, 제건공산당 제주야체이카, 적색농조 준비위 등 항일 경험의 소유자들로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림면 인민위원회의 활동 중에서 주목할 점은 적산 관리였다. 당시 인민위원회 산업부를 맡았던 고종석의 증언이다.

적산이란 일본사람들이 소유, 경영하던 일체의 것들을 말한다. 인민위원회가 주요 공장들과 학교, 관공서를 접수해 관리를 했다. 그러다가 군정청 재산관리과에서 회수하고 미군정이 알아서 관리인을 선정했다. 한때 적산관리를 위해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다케나카 공장으로 옮겨 간판을 달았던 적도 있다.”

해방이 되면서 38도선의 이남은 점령군으로 온 미군정이 지배하게 됐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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