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연의 놋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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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놋그릇 하면 ‘안성맞춤’이란 말이 떠오른다. 경기도 안성에서 만드는 놋그릇은 질이 좋은데다 튼튼하기로 유명하다는 게 그 유래다.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니켈을 섞은 합금, 청동기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이다.

혼사용구·제기·불기·반상기 등 예전 격식 있는 용처엔 대부분 놋그릇이었다. 그만큼 실용적이면서도 무게와 품격을 지녔다. 식기로는 부잣집에서나 썼다.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제기만은 놋그릇으로 채우려 했다.

제사나 명절 때면 집집마다 며칠 전부터 얼룩을 닦느라 부산했다. 어머니와 누이가 하루 종일 매달릴 정도로 손이 많이 갔다. 속돌 가루를 산도짚 수세미에 연신 묻혀 가며 반들반들 빛나게 닦았다. 묵혔다 닦은 놋그릇은 새것처럼 광채가 돌았다. 지금은 녹색 수세미로 문지르거나 하룻밤 식초 물에 담갔다 수세미로 닦으면 얼룩이 말끔히 지워진단다.

쓸 때마다 얼룩진 녹을 닦아야 하니 손질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요즘도 생일 밥상에 놋그릇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니, 그만큼 정성이 담겼을 테다. 어른 생신, 자녀의 생일 축하는 꽃과 케이크로만 하는 게 아니다. 쓰기에 손쉽고 편한 사기그릇을 젖혀 두고 생일 밥을 놋그릇에 담는 데는 그만한 사랑의 마음이 녹아 있으리라. 놋그릇에서 느끼는 듬직함에 마음이 닿았으니 정성이 얼마나 지극한가.

얼마 전, 제주新보 이윤주 기자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서귀포 피로연장에 갔다 깜짝 놀랐다. 동행한 오피니언 필진 너덧도 놀라 한마디씩 한다. 잔치 음식이 온통 놋그릇에 담겨 있다. 밥·국그릇, 수저는 물론 반찬 그릇, 회 접시며 고추장 간장 종지에 이르기까지. 세어 보진 못했지만 넷이 앉은 탁자에 올라온 접시만 열 두셋이 넘었을 것 같다. 밀것이 있어 하지 전처럼 들고 나른다면 팔이 다 빠질 거란 생각부터 들었다. 하루 종일 버텨 낼 재간이 없을 게 아닌가.

궁전웨딩홀. 서른 해쯤 됐을까. 두어 번 갔던 곳인데 까무룩 잊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곳 피로연엔 여전히 놋그릇을 고집하고 있다. 당일 나르고 거두는 것만 힘든 게 아닐 것이다. 잔치를 치르고 난 뒤 그 많은 놋그릇을 어떻게 닦고 건사할까. 아무리 편리한 방법으로 뒤치다꺼리를 한다 해도 쉽지 않을 것인데. 힘듦을 무릅쓰며 놋그릇을 쓰고 있으니 그곳 놋그릇은 이미 서귀포의 명물이 돼 있으리라. 과문이지만 제주시에는 피로연에 놋그릇을 쓰는 업소가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문득 산남 특유의 문화가 생각난다. 상갓집 풍속이 된 특별한 음식 우동. 지금 행정시 서귀포 지역 일대엔 문상객에게 밥을 대접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으레 나오는 게 우동이다. 동창생이 여럿 있어 몇 번인가 문상을 해 왔지만 시종 변함이 없다. 섭섭해서일까. 찐빵을 곁들이기도 했다. 우동은 아무래도 헤퍼선지 빵이 입에 당겼다.

주민들이 가정의례준칙을 따르기로 행동 통일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 수십 년을 이어 오고 있으니 놀랍다. 허례허식에서 벗어나 의례를 간소화한다는 준칙 본래의 취지를 살리고 있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서귀포니까 해내고 있는 것 아닐까. 아열대기후라 주민들 성정이 온후하고 마음 느긋해 여유롭고 수용적이다.

놋그릇을 받아 앉으니 입안에 군침이 돌아 고기며 방어회며 젓갈을 더 불러 가며 포식했다. 산을 넘고 갔다 평화로로 돌아오는 길이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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