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검속 후 800여 명 희생
1956년 만벵듸에 유해 안장
한림지서 습격…이화영 피살
무장대, 한림여관 폭탄 투척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1950년 예비검속 수용소였던 한림 어업창고 터와 제1구서 경찰서 관할지역으로 일제 때부터 이어져 온 한림지서 터, 옛 한림여관을 중심으로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한림의 과거를 돌아본다.
▲한림 어업창고 터
금악리에 위치한 만벵듸 묘역에는 한림어업 창고에 갇혀 있다가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학살돼 6년 만에 돌아온 유해들이 안장돼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림면 관할 구역에서 예비검속돼 총살당했다.
한림포구에는 죽음의 직전까지 갇혀 있던 어업창고가 있었다. 1950년 6월 말 무덥고 습했던 어업창고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설마 죽는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무장대가 한림지서를 습격하고 우익 인사들을 잡아가 살해했다. 더구나 한림지서 지서장인 이화영이 무장대에게 살해당하자 토벌대들은 더 악에 받친 듯 날뛰었다.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6·25가 나자 한림포구 어업창고에 잡혀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1950년 8월 20일(음 7월 7일) 새벽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총살당했다. 그곳에는 모슬포 감자창고에 갇혀 있던 132명도 함께 있었다.
제주도에서 800여 명 이상이 이렇게 희생됐다. 단, 4구 경찰서의 성산포 경찰서장은 ‘총살 집행 의뢰의 건’에 대해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 해 총살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는 모두 무사했다.
한편,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희생된 유해는 6년이 흘렀다.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여긴 유족들은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1956년 3월 30일 모였다. 유해는 63구였다. 유족들은 뼈만 남아 있는 유해를 만벵듸에 안장했다. 다른 구덩이에 있던 132구의 유해도 1956년 5월 18일 유족들에 의해 수습, 비로소 안장됐다. 이른바 ‘백조일손 지지’이다.
1950년 8월 19일 호명된 사람들은 모슬포 송악산 자락 섯알오름으로 끌려가 다음날(20일) 새벽,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 당했다.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9명도 있어서 포함돼 모두 63명이었다.
반면, 한림면 유지급 11명은 1950년 음력 6월 15일(양력 7월 29일) 제주시 정뜨르 비행장에 끌려가 서귀포에서 실려온 사람들과 함께 집단 학살당했다. 이를 두고 ‘한림면 유지사건’이라고 부른다. 한림면 출신 김원석, 김권홍, 강인수, 조병두, 고태옥, 김시백, 고상학 등 7명은 제주비행장 유해발굴에서 DNA 감식을 통해 신원이 밝혀졌다.
▲한림지서터
한림지서는 제1구서 경찰서 관할지역으로 일제 때부터 이어져 온 지서였다. 1947년 5월 한림지서 김병덕 경위와 김석규 경사로부터 강한붕, 김종필이 고문취조 당했다는 고소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김병덕(金炳悳) 경위와 김석규(金錫圭) 경사는 파면됐고, 1947년 6월 16일 제주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기록이 있다.
1948년 4월 3일과 5월 14일 무장대는 한림지서를 대대적으로 습격했다. 4월 3일은 경찰 1명 사망, 2명 부상, 우익단체원 6명이 부상당했다. 5월 14일은 경찰 1명 사망, 면사무소 일부 소실, 면장 가족과 면직원 등 7명이 사망했다. 이날 경찰에 의해 무장대도 5명이 사살됐다.
1948년 8월 19일은 한림지서장 이화영이 토벌 나갔다가 무장대에 피살됐다. 이후 경찰의 강경한 토벌 작전이 전개됐다. 한림 관내 주민들을 검거하고 취조해 군으로 인계하거나 직접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서청 주둔
1948년 4월 3일 4·3이 발발할 무렵, 서북청년 회원 약 10명은 한림국민학교 옆에 있던 한림여관(일명 윤씨주택)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청은 약 100평 되는 여관을 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했다. 4월 3일 밤 무장대는 한림지역을 습격해 지서와 우익인사의 집을 기습했다.
서청이 머물고 있던 한림여관에는 사제폭탄을 던졌다. 급습을 받은 서청들은 창문으로 뛰쳐나와 목숨을 건졌으나 채 몸을 피하지 못했던 2명은 부상을 입었다. 이날 밤 한림여관에는 당시 9연대장이던 김익렬 중령 일행도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김 중령 일행은 습격 직후 여관을 빠져나와 무사했다.
김익렬 중령이 숙박했던 옛 한림여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2층 목조 기와집으로 당시 한림에서는 유일한 2층집이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전형적인 왜식 가옥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로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건물이 지어진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림여관으로 성업을 하였으며, 한때 학원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