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위대한 광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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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몇 해 전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어느 가정의 엄마가 고등학생인 아들 문제로 신앙상담을 하자고 했다. 상담의 대상인 아이는 어려서부터 나와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나도 좀 알고 싶었다.

어려서는 엄마의 말을 그렇게 잘 듣던 사랑스럽기만 했던 아이였는데, 그런데 얼마전부터는 엄마를 피하려 하고 심각한 방황을 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 듣고나서 나는 그 엄마에게 물었다. “그렇게 변했다는 거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있는가?”그랬더니 아직은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 했다. 잠깐 생각하다가 나는 한국의 중학생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북한이 전쟁준비를 다 하고서도 계속 망설이기만 해서, 남쪽에서 스파이를 보내서 알아보았더니 이런 사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북한의 권력자들이 남한의 중학생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러시아 아줌마가 물었다. “한국의 중학생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청소년기의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저 나이 때 아이들은 정신적인 방황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라는 대답을 해준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엄마는 이런 대답을 했다. “러시아의 엄마들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너무나 착하기만 했던 아이인데 그래서 지금 방황하는 아이를 보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때는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린 지금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소중한 관계가 아니었다면 고통스러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비참함은 위대함의 결과이고 또 인간의 위대함은 비참함의 결과이다.” 인간이 비참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본래 위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금도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젊어서 이사를 많이 다녔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서울에서 어떻게든 혼자 알아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이사를 무척 많이 다녀야 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아르바이트가 흔했던 시대가 아니었다. 버스 탈 돈이 없어서 광화문에서 노량진까지 걸어갈 때가 있었다. 그 어렵고 위험한 고비고비를 어떻게 넘어올 수 있었는지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 위험하고 어렵던 광야의 시기를 거쳐서 나는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광야의 시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광야와 같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광야는 버려진 비참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대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요즘의 대한민국이 비참하게 버려져 가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앞이 안 보이는 혼란이 언제까지일 것인지 이 나라가 광야에 버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한 광야 너머 저편 미래의 한국을 생각하면 이 거칠고 어려운 시기가 위대한 광야의 시간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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