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품’
‘엄마의 품’
  • 제주신보
  • 승인 20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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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우리는 똑같이 두 팔을 벌려 그 애를 불렀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가 풀밭을 되똥되똥 달려왔다 한 번쯤 넘어졌다 혼자서도 잘 일어섰다. 그 애 할아버지가 된 나는 그 애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들고 있었고 그 애 할머니가 된 내 마누라는 그 애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들고 있었다 그 애 엄마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빈손이었다 빈 가슴이었다 사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달려온 그 애는 우리들 앞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초콜릿 앞에서 바나나 앞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본시 그곳이 제자리였다 알집이었다. 튼튼하게 비어 있는, 아, 둥글구나’ (정진규의 〈엄마의 품〉 전문)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슴 되게 울렁거릴 것이다. 풀밭에서 첫 걸음을 떼 놓은 아이의 아슬아슬한 직립 실험, 그 순간. 아이는 좋아 키득거릴 것이고 엄마는 기뻐 활짝 웃을 테다. 아이가 처음 서서 걷는다. 대사건이다. 이런 황홀한 순간이라니.

엉금엉금 기다 일어나다 넘어져 뒹굴다 일어서 첫발을 내딛었다. 첫돌의 눈부신 진화, 한 아이의 놀라운 성공신화다. 지켜보던 가족들 너나없이 일제히 손뼉치고 환호하리라.

눈앞에 극적인 장면이 벌어진다. 풀밭을 되똥거리며 걸음마 떼어놓는 아이를 어른 셋이 꼬드긴다. “아가야, 이리 온. 이거 줄게, 초콜릿.” “아니야. 이게 달아요. 바나나.” 그중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어른이 말 대신 맛있는 걸 손에 들어 흔들어대고 있다. 어서 오라고, 넌 귀여운 내 새끼니까 내게 오라고, 와서 내 품이 안기라고. 초콜릿과 바나나 둘 다 손주가 좋아하는 걸 안다. 그래서 고른 것이다.

한데 아이는 맛있는 초콜릿도 바나나도 택하지 않았다. 두 어른 앞에서 멈칫했을 뿐이다. 아이가 뛰어든 것은 엄마 품이었다. 초콜릿도 바나나도 없는 엄마의 빈 가슴이었다. 아이의 선택은 여지없었다. 매달려 젖을 빨던 애초의 품, 따뜻한 가슴이었다. 자식보다 두 벌 자손이라지 않는가, 아들보다 손주를 더 아끼는 건 인지상정이다.

사실이지 조손간 사랑이 모자간의 사랑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더하고 덜하고 견줘서도 안된다. 1촌과 2촌이라고 친족계보의 촌수를 셈할 것도 아니다. 보라,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쪽으로 기울다 마지막 고비에서 엄마를 택한 것뿐이다. 웃어른을 숫제 외면한 게 아니고 얼굴을 돌리고 등을 보였을 뿐이다. 단지 그랬을 뿐이다.

아이는 선택형 시험을 친 게 아니다. 그냥 엄마 쪽으로 돌진한 것뿐이다. 초콜릿과 바나나라는 장치는 인위이고 기교일 뿐인 게 확연해진 순간이다. 엄마의 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위이고 본래라 그런 것이다. 부모 없이 크는 조손 가정의 아이들 그림에 반드시 엄마 아빠가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엄마의 품은 아이에게 원초다. 세상 어느 자리, 어느 곳보다 편안하고 안심되는 그 자리, 알집이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면서 가장 그리워하는 근원의 자락, 잊히지 않는 둥그런 시원의 세계, 우주다. 그것은 통속이 아닌, 때 묻지 않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것, 먼지 하나 섞이지 않은, 흠결 없는 완미(完美)한 처소다.

어미의 사랑이 머무는 곳, 무욕이고 무심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경건하게 포용이란 걸 배웠던 자리다. 최초의 믿음으로 기억되는 그곳, 엄마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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