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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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구 수필가

바다는 어린아이들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 변하기를 수시로 하며 시시각각 얼굴을 바꾼다. 서우봉 오름길에 펼쳐진 바다는 참 고요하고 맑다. 명경지수가 이러한가. 머지않아 비라도 내리려는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한라산과 절친한 사이처럼 물속에 산을 품고 있다. 이러한 바다이건만 금방 얼굴을 바꾸며 갖은 심술을 부리며 심지어 귀한 생명까지 앗아간다.

차귀도와 마라도에서 조업을 나갔던 고깃배가 원인도 알 수 없는 사고로 십 수 명이 목숨을 잃고 시신도 수습 못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다. 바다가 그리 사람하고 가까운 사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 고향은 바다가 있는 마을이라지만 그리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집과 바다는 멀리 한 참도 더 넘게 멀리 떨어져 있어 어린아이들이 접근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고, 커다란 냇가가 바로 코앞에 있으니 그 곳이 놀이터였다. 그저 먼 곳으로만 보이는 그곳이 바다라고만 알고 지내고 있었을 뿐이다.

바다를 가까이서 처음 대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인 다섯이나 여섯 살 무렵으로 봄볕 따사로운 늦봄인 것 같다. 좀녀인 어머니가 물질하러가는 길에 따라나선 것 이다. 처음으로 걸어간 먼 길이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처음으로 가까이서 바다를 대면하였던 기억이 더 커서인지 그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신작로라 불리는 일주도로를 건너 비탈길을 조금만 더 내려 간곳에 바다가 있었다. 고개 마루를 지나는 순간 내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그 눈에는 잉크 색보다 더 진한 검푸른 물결이 일어서며 나를 덮칠 듯 했다. 바다를 가까이에서 처음 보았던 당시에 왜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모르나 예순 대여섯 해가 지나도록 첫 대면하였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박혀있다. 그 바다는 먹돌케인데 왜 그렇게 비쳤을까.

어느 해던가는 물질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된 어린 좀녀가 피어보지도 못하고 먹돌케 바다에서 사고를 당해 그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하였다. 돌아가신 분은 친구의 누나였다.

성산포에 있는 이모댁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닐 때였다. 자그마하게 해물장사를 하셨던 이모 심부름으로 오정개 포구에서 부산 뱃머리가 있던 축항까지 전마선으로 소라를 실어가라며, 노를 저을 줄 아는지 물었으나 젖지 못한다는데 초등학생인 사촌동생이 성산포에서 자라나서인지 자기가 노를 저을 수 있다하여, 밤이 되어서 소라를 가득 싣고 출발하였다. 십여 분이나 노를 저어 갔을까 배가 암초위에 걸려 꼼짝을 않았다. 주위가 캄캄하니 어떻게 걸려 있는지 확인할 수 도 없었다. 몇 시간을 낑낑대다보니 들물 탓이거나 물결이 밀려준 때문인지 암초위에서 벗어나서 무사하게 운반을 마칠 수 있었다. 밤이 깊어져 집에 들어가니 이모께서는 몇 시간을 서튼 사람을 보낸 것을 후회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암초에 걸려서 전전긍긍하던 시간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하였을 것인데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추억뿐이다.

학교에 인접하여 보를 막은 천연 양어장이 있고, 그 양어장에는 우도에서 온 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성산포를 오고가는 중간에 있으니 가끔 들리면서 새로 만난 벗들과 얼굴을 익혀가고 있었다. 날씨가 풀려가는 토요일 그날은 고향에도 가지 않는지 그곳에서 전마선을 타고 놀다가 싫증이 날 무렵 뛰어 내리는데 사람이 내릴 때마다 배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감안치 않고 내 차례가 되어서 뛴다는 게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깊지는 않은 곳이나 홀딱 젖은 꼴이라니 우습기도 하지만 울상을 자기에 알맞더라.

해양훈련이란 게 있었다. 통밭알에서 성산항 방파제까지 밀물에 헤엄쳐가는 것이다. 거리라야 1km 남짓이나 되었던가. 성산과 오조리 사이 해협으로 밀려드는 밀물이 앞으로 나아가기가 녹녹치 않았다. 부지런히 손과 발을 놀렸으나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일행에 비하여 점점 뒤쳐지기만 하였다. 그래도 낙오돼지 않고 많이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방파제 검은 바위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지금은 뭍 나들이라면 으레 비행기를 이용하여 쉽게 하지만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선박을 주로 이용하였다. 그때마다 선박이 기름 냄새와 토사물을 뱉어놓는 찌그러진 깡통, 그 냄새들이 상승작용을 하며 사람이 비위를 뒤집어 놓았다. 더구나 쉬지 않고 통통 거리는 기관 소리는 밤새도록 인내하고 고통을 참으며 수양을 쌓게 하였던 시간들이었다.

서귀포에서 성산항을 경유하여 부산을 다니던 남영호가 한 겨울에 침몰하며 수많은 목숨을 가져가더니, 몇 년 전 숙부인 샛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진도 앞바다 팽목항 인근에서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원인도 모르게 사고를 당하면서 피워보지도 못한 수많은 학생들을 수중고혼 시키기도 하였다. 이것도 섬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피할 수 없는 숙명은 아니던가.

십 수 년 전 캐나다 밴쿠버에서, 항구에 멋있고 커다란 배가 정박되어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알래스카를 오고가는 정기연락선이라고 한다. 이렇게 큰 여객선도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배들이 도입되어 운행되고 있었다.

근자에 몇 번 부산이나 완도 쪽으로 나들이하다보니 예전 당시 300여 톤짜리 목선에서 이제는 1만 톤가량 되는 철선인 페리호로 교체되고 속도도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지니 예전 같은 괴로움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호화선박에서 갖가지를 해결하며 즐기는 크루즈 여행이 인기라고 하다.

바다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섬에서 그를 피할 수 없으니 안전사고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는 길만이 최선이 길은 아닐까. 그래도 얻어지는 혜택이 많은데 바다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아왔을꼬. 앞으로는 해난 사고 없는 바다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2019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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