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 사회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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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생원·진사로 이어가는 양반의 꿈
생원진사시 급제로 양반 계급 인정
성균관 입학 자격, 생원·진사 칭호
1차 향시·2차 복시 통해 100명 선발
제주지역 문과보다 급제자 수 적어
방식·절차 어렵고 지역적 고립 영향
제주향교 내 유생들이 모여 유학을 배웠던 강학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제주향교 경내 모습.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제주향교는 세워질 당시 지금의 중앙로인 교동에 있었으나 여러 번 옮겼다가 지금의 용담동 현 위치에 이른다. 제주 출신 생원 급제자인 김양필은 제주향교 명륜당 현판의 시를 썼다.
제주향교 내 유생들이 모여 유학을 배웠던 강학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제주향교 경내 모습.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제주향교는 세워질 당시 지금의 중앙로에 있었으나 여러 번 옮겼다가 지금의 용담동 현 위치에 이른다. 제주 출신 생원 급제자인 김양필은 제주향교 명륜당 현판의 시를 썼다.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에는 문과, 무과, 잡과 외에도 생원진사시가 있었다. 과거가 국가직 공무원 임용 시험이었기 때문에 문과와 무과, 잡과 합격자에게는 등위에 따라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는 실제 관직이 주어졌다

이때 주어지는 합격 증서를 홍패라고 한다. 그러나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자격과 합격 증서인 백패가 주어졌다. 홍패가 붉은색 한지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하얀색 한지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백패라 부른다

생원진사시는 일종의 입학 자격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험에 급제한 사람에게는 한양에 있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과 함께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의 칭호가 주어질 뿐 실제 관직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생원 진사시에만 급제해도 양반으로서의 계급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 1894년에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기 위해 노력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공식 명칭은 생원 진사시였지만 소과, 사마시라고도 불렸다. 소과는 대과라 불리는 문과와 대비시키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또한 생원 진사시 급제자들의 신상정보가 요약 정리된 명부를 사마방목이라고 한다. 생원 진사시는 조선 건국 이듬해인 1393(태조 2) 처음 시작돼 1894(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되기까지 502년간 모두 230회가 실시됐다고 알려진다. 문과가 580여 회 실시된 것에 비하면 시험 회수가 매우 적다.

생원 진사시를 치르기 위해서는 우선 각 지역에서 1차 시험인 향시를 치러야 한다. 향시의 시험장소는 도내의 소속 읍에서 돌아가면서 정했고 시험관은 보통 감사가 임명하기도 하고 조정에서 따로 파견하기도 했다

1차 시험을 초시라고도 하는데, 제주를 포함한 전라도에서는 보통 생원 후보 90, 진사 후보 90명 총 180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향시 합격자들이 한양에 모여 복시를 치른 후 최종 급제자를 선발한다

보통 생원 100명 진사 100명을 최종적으로 선발하는데, 생원으로는 유교 경전 이해력이 뛰어난 자, 진사는 시와 문장 작성 능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했다. 이런 생원 진사시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선발 인원이 급증하는 경향을 보인다.

제주 지역민들은 지역적 고립으로 인해 향시에 합격한 다음 상경해 다시 시험 보는 과정을 거치고 급제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에 정리된 생원 진사시 급제자들 중에서 제주지역 거주자들을 조사해 보니 몇 가지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첫째 조선 전기에 급제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거의 광해군 이후부터 급제자들이 보인다

둘째 급제자가 26명으로 매우 적다. 통계라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대인물정보의 기록만 놓고 보면 문과는 57, 무과는 161명이다. 문과보다 쉬운 시험임에도 급제자가 더 적은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이것은 아마도 시험의 방식과 절차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생원 진사시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라도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합격한 후 한양에서 복시에 합격해야 하는 복잡하고도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셋째, 급제자가 특정 가문에 몰리지 않는다. 이는 확인된 전체 급제자 수가 적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정덕5년사마방목(正德五年司馬榜目)’의 김양필 생원 급제 기록(연세대 소장).

제주 출신 생원 진사 급제자 목록의 맨 앞은 김양필(金良弼)이라는 사람이다. 김양필의 자는 몽득(夢得)이다. 사마방목에는 본관이 제주로 되어 있는데, 제주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김양필의 본관을 경주로 보고 있다

부친은 전 용양위부사과 김수려(金秀麗)이다. 1510(중종 5) 생원 진사시 생원 3등으로 급제했고, 제주향교 교수를 지냈다. ‘여지도서에는 그가 명륜당 현판의 시와 백록동규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1520(중종 15) 제주에 유배 온 충암(沖巖) 김정(金淨, 1486~1521)이 그가 지은 제주풍토록에서 그의 문장을 칭찬하는 것으로 보아 학문적 소양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진사시 급제자 26명 중 6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순조대 이후 급제자이다. 생원진사시에서는 보통 200명을 최종 선발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오면서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면서 급제자가 급증한다

제주 출신 급제자가 조선 후기에 많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사실로만 보아도 일반적인 과거를 통해 제주민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으로 진출하기는 매우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생원진사시는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었다. 급제가 비록 정식 관직을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섬이라는 지역에 고립되어 살면서도 조금이나마 세상에 가문과 자신을 드러내려는 제주민들의 열망을 담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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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창진(梁彰珍)은…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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