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못하는 병
쉬지 못하는 병
  • 제주신보
  • 승인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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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수필가

병에 걸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심각한 줄 몰랐다. 쉴 줄 모르는 병이다. 누워 있으면서도 유튜브로 강의를 듣는다. 하다못해 누운 채 책이라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니 뇌는 쉴 수 없다.

이번 설에 서울에 있는 큰아이가 내려왔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좋아해서 몇 가지 요리를 했다. 가족이 다 모이니 흡족했다. 편안하게 오래 담소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이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나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대화가 자주 끊긴다. 주부에게 집은 노동의 장소라는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며 가스레인지를 닦는다. 뜨거울 때 청소해야 말끔히 할 수 있으니 지금 바로 해야 한다. 보다 못한 아이가 말한다.

엄마, 좀 쉬세요.”

아니야, 괜찮아, 얘기해.”

아이들이 어릴 때도 인내심을 가지고 말을 잘 들어주지 못했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나, 친구 관계도 하나부터 열까지 얘기해 준다. 눈을 마주 보며 다정하게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보통 빨래를 개거나 식사 준비를 하면서 들어 주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다음 날 먹일 것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낮에는 시간이 안 되니 저녁에 청소와 세탁도 해야 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쌓아 놓은 과제물을 처리하거나, 시간에 맞춰 퀴즈도 풀어야 한다. 아이들이 크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도 마음뿐이다. 동동거리며 살아온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멀리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 싶어 차 한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온다. 벌써 마음이 출렁거린다. 오래 있어 보려고 애쓰며 정원석을 바라보다 의자로 가 앉아 본다. 잔디 마당에 잡초가 몇 개 보인다.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러 나갔던 애초의 생각은 잊어버렸다. 차가 채 식지도 않았는데 바로 일어선다. 호미를 손에 쥐며 십분 넘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어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감한다. 쪼그려 앉아 풀을 뽑으니 좀 안정된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가끔 불안하고 초조하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학문을 전공한 딸이 도움을 주기에 여기 옮겨본다. 불안은 마음이 미래에 있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이어진다. 기운이 위로 뜨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집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거나 서성거리게 된다.

반면 우울은 마음이 과거에 있다. 그렇게 되면 후회와 수치심 같은 감정을 느낀다. 우울의 기운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활동이 저절로 줄고 기력도 줄어들게 된다. 존재가 현재에 있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에 있게 되면 현재를 경험하지 못하니 자주 헛헛하고 공허하다.

지금, 여기를 경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을 때 밀도 있는 인생을 살고 경험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신체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듣고 있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신체 감각을 통해 정신을 현재로 데려오고, 그 이후에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것은 자기를 향한 위로가 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살고 싶었구나. 그러느라 힘들었구나.’라고 자신을 토닥여주어야겠다.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행복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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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익 2020-03-18 21:53:06
잘 쓴 칼럼입니다.. (69세, 수필괴비평. 2000년12월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