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학생 신분으로 일제의 민족 차별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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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 김응빈①, 제주판관 재임 시 폐단 고친 공
항일활동가 김응빈②, 농업학교 시절 교육 정책에 저항해
김응수, 노형동 월랑촌서 후학 양성…한문 해석 강의 유명
조선 후기 무신 김응우, 청렴한 제주판관…조천에 선정비
김응전, 명월만호 등 지내…방성칠의 난 수습·귤회 조직
1938년 3년제로 승격된 제주공립농업학교의 수업 장면. 김응빈은 1930년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해 일본인 교장 스기사키의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차별성에 저항하기 위해 교장 관사를 파손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38년 3년제로 승격된 제주공립농업학교의 수업 장면. 김응빈은 1930년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해 일본인 교장 스기사키의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차별성에 저항하기 위해 교장 관사를 파손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응빈金膺斌①:1846(헌종12)~1928(일제강점기), 무신. 제주판관. 귤회를 조직, 일명 응빈膺彬. 조천리 이동梨洞파 김씨 김경임金畊任의 아들이다. 자는 경헌景憲, 호 위당韋堂 혹은 남강南岡이다

1891(고종28) 무과에 급제, 같은해 4월 고종행高宗行의 후임 명월만호로 부임했다. 18917월 그만두었다.

1891(고종28) 8, 윤자선尹慈善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도임하고 이해 12월에 모친상을 당해 떠났다. 김응빈의 판관으로 재임기간은 불과 4개월이나 폐막구폐弊瘼救弊에 공이 있었다고 해서 비석이 세워졌다

1898년 방성칠房星七의 난이 일어나자 조천에 창의소를 마련해 창의장倡義將으로 이를 진압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만년에는 영주음사瀛州吟社를 조직, 도내의 시인묵객을 모아 시율로 취미를 삼았다. 당시 유배인 청음晴陰 김윤식金允植과 깊이 교유했고 이 무렵 유배인들과 문학적인 교류를 도모하기 위해 귤회橘會라는 동인 모임을 만들었다

이때 김윤식이 김응빈을 위해 지은 남강서옥기南岡書屋記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김응빈金應彬②:1914(일제강점기)~?(분단시대), 일본에서 학생 항일활동. 호는 현우玄友, 본관은 김해. 구좌읍 월정리<무주->의 김윤지金允止 차남이다

김응빈은 19303월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해 4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다.

19313월 일본인 교장 스기사키<杉崎勝藏>의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차별성에 저항하기 위해 2학년 동급생 이두일李斗一 10여  명이 교장 관사로 몰려가 건물·기물을 파손했다. 김응빈은 이 일로 제주경찰서에 13일 간 구류됐다

1933년 일본 오사카 나니와<浪華>상업학교 3학년에 편입, 1936년 도쿄에서 목포유학생친목회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됐다. 같은해 3월 나니와<浪華>상업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36년 연말에 동경 유학생 친목 망년회 모임에서 항일적인 언사를 썼다고 하여 호총戶塚경찰서에 끌려가 40일 취조를 받았다. 1938년 하기휴가 때 귀향, 제주경찰서에서 4일 간 구속 조사를 받은 바도 있다

김응수金應洙?~1917(일제강점기). 훈학자. 호 소석紹石, 본관 광산, 경기도 수원, 문경공 김낙현金洛鉉의 손자이다

1912년 종사宗事문제로 제주에 들어와 제주시 노형동 월랑촌月朗村에 혼자 살면서 후진들을 교육했다. 소석의 한문 강설은 원전에 접근해 정확히 해석하기로 유명했다

학부국장學部局長이 되어 제주에 들어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노형리의 월랑촌月朗村에서 작고하였다

19178월 월랑 마을에서 죽으니 문하생과 문우들에 의해 정성껏 치전致奠할 수 있었다. 이 고장 문사들과 어울려 외로움을 시음詩吟으로 달랬고, 그의 유시遺詩증보탐라지’(담수계)에 실려 있다. 주성의 문인들이 번갈아 거상했다

김응수의 시시의 제목= 遊漢拏山 한라산에 노닐며, 山靈如我好奇遊내가 기이한 곳에 놀기 좋아함을 산신령도 알고/不遣閒雲一點浮한가한 구름 한 점도 띄워 보내지 않는구나!/眼力未窮溟渤外눈으로는 넓은 바다 밖을 다 보지 못하지만/已攝井參頭발꿈치는 이미 정성井星과 심성參星 머리에 이르렀네!/六鰲背上幾千却여섯 마디 자라의 등 위에서 몇 겁을 지냈는지/萬里派中一葉酒멀고 먼 파도 속의 한 조각배와 같으나/白鹿不知河處去흰 사슴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고/空潭盡日飮黃牛조용한 못에는 종일토록 물을 마시는 황소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비석거리에 세워진 김응우 선정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비석거리에 세워진 김응우 선정비.

김응우金膺友1857(철종8)~1909(융희3), 무신. 제주판관. 조천리 이동파梨洞派 김기임金基任의 아들이고 정의현감을 지낸 김응병金膺柄의 아우이다. 본관 김해, 자는 자익子益이다

1890년 무과에 급제하고 1892(고종 29) 9, 송두옥宋斗玉의 후임으로 도임했다. 189311월에 이임했다. 재임 중 청렴하고 근신으로 일컬어져 통판김공응우선정비通判金公膺友善政碑189411월 조천리 비석거리에 세워졌다

김응전金膺銓1833(순조33)~1915(일제강점기), 무신, 귤회橘會 조직, 충청남도 해미현감海美縣監. 자는 방형邦衡, 호는 귤은橘隱, 본관 김해. 조천리 이동梨洞파 김씨 김경임金畊任의 아들로,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金膺斌의 친형이다

김응전은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으나 산업을 일으키고 근검하여 자못 여유가 있게 되고, 몇 차례 문과에 응시했으나 적중하지 못하자 1877년 무과에 급제되었다

1878(고종 15) 김기호金基鎬의 후임으로 명월만호明月萬戶에 부임하였으며 전미田米 2백 섬을 회사하여 진휼賑恤에 보태고, 동년 10월에 그 직을 그만두었다

18982월 요적夭賊 방성칠房星七이 남학당南學党의 어남군御南軍 2백 명을 거느려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를 내쫓고 주성州城을 점거하였다. 김응전은 하나 있는 아우 응빈膺斌을 불러 내가 이제 늙어 나설 수 없어 아우에게 당부하노니 전 현감출신인 홍재진洪在晋과 송두옥宋斗玉 등을 일으켜 역적을 물리칠 창의병倡義兵을 발동하라.”고 당부했다. 드디어 김응빈은 근왕병을 일으켜 방성칠의 목을 베고 민란을 수습하였다

한편 김응전은 유배인 김윤식, 한선회韓善會, 서주보徐周補, 정병조鄭丙朝, 김사찬金思燦, 김경하金經夏, 이범주李範疇, 이태황李台璜, 이승오李承五 등과 함께 시회詩會에 참여했다. 본도인 김병윤金炳胤, 정현구鄭顯龜, 이긍식李肯植, 최원순崔元淳, 홍종시洪鐘時, 김응빈金膺斌 등도 한데 어울려 한시동인회인 귤회橘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각자 돌아가면서 매월 초하루에 소집하여 시작詩作에 몰두하며 친목을 도모했다. 운양雲養 김윤식은 늘 김응전을 문장가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1898년 음력 8월 초하루에는 방성칠난을 평정한 기쁨으로 김응전은 귤회 동인들을 조천 자택으로 초청하여 제13차의 귤회 모임을 갖기도 했다. 이런 모임을 통하여 유배인의 한시 기법을 전수받아 본도의 한시 수준을 한층 높여줬다. 이들은 동인지 귤림아집橘林雅集을 발간해 우수 작품을 게재하였다. 이러한 문인들의 전통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영주음사瀛州吟社로 발전, 오늘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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