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남은 사람들의 한과 눈물, 그 흔적을 살피다
살아 남은 사람들의 한과 눈물, 그 흔적을 살피다
  • 제주신보
  • 승인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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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특별중대, 학살·고문 자행
무소불위 위세…공포의 대상
명월동, 소개령으로 마을 전소
주민들 성담 쌓고 집단거주해
20여 명 희생…잃어버린 마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상동 주민들은 1949년 봄부터 마을에 성을 쌓고, 성안에 함바집을 지어 살았다. 사진은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상동에 남아있는 4·3성 모습. 성담은 현재 200m 남짓 남아있다.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상동 주민들은 1949년 봄부터 마을에 성을 쌓고, 성안에 함바집을 지어 살았다. 사진은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상동에 남아있는 4·3성 모습. 성담은 현재 200m 남짓 남아있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6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3·1절 기념식을 거행했던 한림초등학교 터와 4·3 당시 마을이 전체가 전소된 잃어버린 마을 빌레못을 들여다본다.   .

한림초등학교 터(한림리 1384번지)

한림국민학교는 해방 후 한림면 건준과 인민위원회 결성식을 했던 곳으로 194731일에는 6000여 명이 모여 3·128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4810월 이후, 처음 9연대가 주둔했던 한림리는 토벌대의 한림지역 토벌근거지가 됐다. 9연대는 한림중학교 교정에서 19481116일 한림중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학생 4명을 학살했다. 그 직후 서청특별중대가 약 1개월 주둔했다

서청특별중대는 지역주민, 특히 중산간 마을 소개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서청특별중대는 무소불위의 위세로 무차별 주민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학살했다

신겡이서들(동명리 1600번지 일대)

신겡이서들은 가마귀왓’, ‘축산이 동산이라고도 부르는 지역으로서 미모루동산까지 한림면에서 대표적인 희생터였다. 4·3 당시 무연고 묘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으슥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소개민들이 한림국민학교에 주둔했던 서청특별중대나 군경토벌대에 의해 끌려와 수차례 학살됐다. 주로 194812월과 1월 사이에 60여 명이 희생됐다

신겡이서들 부근 물왓’(현재 한림초등학교 동쪽 주택가 지역)에서 194812, 1월 사이에 30여명이 희생됐다. 다음은 한림에 거주하는 김철호씨의 증언이다

내가 신겡이서들에서 있었던 사건을 한 번 목격했어요. 맨 앞에는 사형자들이고 그 다음은 경찰, 그 다음은 학도연맹원, 맨 뒤에는 군인들이 차례로 가는 거예요. 지금 동명회관 있는 그 부근이었어요. 신겡이서들이라고. 열네 사람을 죽였어요. 학도연맹원들이 밭담에서 망을 보고, 사형자들은 밭담을 따라 일렬횡대로 꿇어 앉혔어요. 사격거리는 길지 않았죠. 대충 15m 정도 거리에 경찰 6명과 군인 2개 분대 병력이 서서 발포했어요. 그렇게 쏜 다음 어떻게 한 줄 알아요? 학도연맹원들에게 죽창으로 찌르라는 거예요. 그리고 맨 나중에우리 보고 삽으로 묻으라고 해요. 비가 온 뒤라 땅은 축축했어요. 우린 까마귀가 시체 눈을 안 빼먹을 정도만 덮었죠. 다 덮을 수가 없었어요. 군인이 2개 분대 정도. 순경이 여서 일곱명. 또 학도호국단원이 15명 있었고 우리 (민보단)지단 연락병도 15명이나 됐어요. 군인들이 먼저 가자 우리와 순경 한 명만 남아서 뒤처리를 했어요. 처녀가 여덟 명이고, 남자 여섯 명 해서 모두 열네 명이었을 거예요. 명월 오매춘 하면 당시 유명했는데 오매춘과 오매춘 부모들이 이 날 죽었다는 거예요.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앉았는데 돌아앉으라고 해서 할아버지에게 빨간 보자기를 씌웠어요.”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빌레못 마을터에 세워진 표지석.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빌레못 마을터에 세워진 표지석.

명월 4·3 성담과 잃어버린 마을 빌레못

청풍명월의 고장인 이곳 역시 4·3의 광풍을 피할 수 없었다. 고림동이라 불리는 명월 상동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다

194811월 소개령이 내려져 상동과 중동 주민들은 명월 하동, 옹포리, 강구리 등지로 피난을 떠나야 했고, 명월 상동과 중동에서의 토벌대의 방화로 명월의 향토유산 대부분이 잿더미가 됐다

1949년 봄부터 상동 주민들은 마을에 성을 쌓았고, 성 안에는 이웃 마을인 금악리와  상명리 주민들도 집단거주 했다. 현재 상동에 남아있는 안성은, 도로를 내기 위해 중간 성담이 없어져서 두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내성인 안성 근처에는 성담 쌓는 일을 지휘한 군경 사무실 터도 남아있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조천읍 선흘리 낙선동의 4·3성처럼 경찰이 높은 위치에 망루를 지어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면서 성을 쌓도록 했다고 한다

주민이 가장 많이 살았던 중동은 1950년 봄이 돼서야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고, 마을 포제단 근처에 있는 중동 성담도 이 당시에 쌓은 것이라 한다

제주시 화북동의 곤흘동처럼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인 명월빌레못마을에는 2513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순례길에서 약 100m 떨어진 지경에 위치해 있는잃어버린 마을 빌레못마을터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4·3의 아픔을 적고 있다

여기는 4·3의 와중에 마을이 전소돼 잃어버린 북제주군 한림읍 명월리 빌레못 마을터이다. 빌레못이란 돌빌레 위에 못이 형성된 곳으로 옛날에는 식수와 우마 먹이는 물로 사용됐다. 지금으로부터 180여 년 전 강씨, 홍씨, 양씨 세 가호가 설촌한 이래 25가호 130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바람도 소리 없이 찾아들어 머물러 가던 이 마을에도 1948년 제주 전역을 휩쓴 4·3의 광풍은 여지없이 몰아쳤다. 1120일 경 소개령에 의해 가옥은 전소돼 잿더미가 되고 주민들은 해안 마을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어디 그뿐이랴. 20여명의 고귀한 인명이 희생돼 바람길 구름길에 떠도는 고혼이 됐구나. 1949년 봄 명월리 고림동에 축성을 하고 가건물을 지어 살게 된 이후 주민들은 빌레못으로 돌아오지 않아 지금은 연못터와 대나무만이 예전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