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만든 공산주의자 살해
미국이 만든 공산주의자 살해
  • 제주신보
  • 승인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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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논설위원

1947년 3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대외정책노선의 대전환을 선언했다. 미국은 반공국가를 위해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공산주의의 배격과 확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트루먼은 이미 1946년부터 소비에트연방의 팽창을 우려한 조지 케난 주소련 미국대사의 전문을 읽고, 그의 대소련 봉쇄론을 수용했다. 나치 독일과 일본 등 악의 축을 구축하기 위해 공동전선을 폈던 연합국 소련의 팽창주의를 우려한 대비책이었다.

1947년 초반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제주주둔 미군 제58군정중대는 제주사람들과 큰 마찰이나 충돌이 없이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미군은 1947년 3월 초 관덕정학살을 벌인 뒤부터 제주섬을 공산주의자와 연관된 것처럼 낙인을 찍고 불온시하는 적대시정책을 앞세워 억압하기 시작했다. 과거 일제 강제점령시기 독립운동가들을 뒤쫓고 잡아들이던 일제경찰이 미군정 산하 경찰로 재기용되어 지배기구의 일원이 된 탓도 매우 컸다. 민족해방운동 지사들을 적색분자로 낙인찍어 탄압하던 관행을 반복했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제가 물러가는 동안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치안공백을 메우고 행정자치능력을 발휘하여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기구로 많은 일을 했다. 인민위원회는 학교를 세우고 미래세대를 육성하는 교육운동도 활발히 벌였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이들을 신뢰하고 지지했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었고, 이들이 1947년 3·1운동 28돌 기념 사업을 벌였다. 여기엔 좌우의 대립이 없이 모두 함께 참여했다. 당시 제주섬에서 6명이 죽고 8명이 크게 다치는 관덕정학살이 일어나던 시기에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워싱턴 특별구역에 출장 중이었고, 우익 지도자 이승만 역시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역설하며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미군은 북위 38도 이남 점령지역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노선을 정치적 배제의 목표로 삼았다. 1946년 8월 미군청 여론국은 사회조사를 했다. “귀하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 형태는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가. 개인독재(민의와는 무관계) 219명(2.6%), 나. 수인독재(민의와는 무관계) 323명(3.8%), 다. 계급독재(타 계급과의 유지와는 무관계) 237명(2.8%), 라. 대중정치(대의정치) 7221명(85.4%), 마. 모릅니다 453명(5.4%)”라고 응답했다. 대의정치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높았다. 그리고 “귀하께서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가. 자본주의 14.1%(1189명), 나. 사회주의 71.4%(6037명), 다. 공산주의 6.8%(574명), 라. 모른다 7.7%(653명)”라고 응답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찬성이 가장 높았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비교적 건전하고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전면 부정했다. 미국 대통령이 소련의 대외팽창을 깊이 우려하고 저지하기 위해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반공주의로 선회하게 되자마자 미군정 역시 관련 사회단체와 주요 정당에 대한 배제와 탄압을 전면화하였다. 그래서 공산주의세력을 축출하려는 공작을 벌였다. 바야흐로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들을 악마로 보게 하는 지배이념이 되었다. 미군은 제주섬에서 1948년 5월 10일 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하는 자들을 잡는다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수만 명의 민간인학살에 깊이 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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