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과·대과 동시 급제…당대 인재로 인정받았다
소과·대과 동시 급제…당대 인재로 인정받았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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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득종·김계륭·오섬·오정빈, 제주출신 생원 진사시·대과 이어 급제
학문 소양·정책 제시 실력 갖춘 것 평가돼…지역 사회서 이름 떨쳐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흥숙 오정빈의 무덤 전경. 묘 앞 비석에는 오정빈의 사마시 급제, 만경현령 재임 사실 등이 적혀 있다. 오정빈은 1687년 진사시에 3
등으로 급제했고, 170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조선 시대에 치러진 과거 시험은 크게 세 가지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첫째는 논어, 맹자, 대학과 같은 유교 경전에 대한 암기력 및 이해력이고 둘째는 시문 등 문장력, 셋째는 사회 현실의 문제에 대한 정책 대안 제시 능력이다

이 중에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와 문장력을 시험하는 것을 중점으로 하던 것이 소과 또는 사마시라고도 부르는 생원 진사시였다

따라서 생원 진사시에 급제했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소양이 매우 뛰어났다는 말과도 같다

생원 진사시는 국가 공무원 임용을 위한 과거 시험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급제에 도전했던 것은 합격 그 자체만으로도 학문적 소양을 갖춘 양반으로서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과에 도전할 자격이 되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는 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원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학문적 소양과 함께 현실의 사회 문제에 대한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인재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국가 사무를 보는 관리로 임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생원 진사시를 거친 후 문과에 급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급제하면 당대의 인재로 인정받을 만한 일이었다

제주 출신 생원 진사시 급제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현재 파악된 제주 출신 생원 진사시 급제자는 26명 정도다. 이 중 20명은 19세기에 급제한 기록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약 400년간 기록의 공백기라 할 정도로 확인되는 제주인 급제자가 적다.

생원 진사시와 관련해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고득종(高得宗)이다. 그러나 고득종의 생원 진사시 급제를 기록한 사마방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태종실록’ 26권에 생원 고득종 등은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다 여막을 짓고, 처음으로 3년 상을 치러 온 고을이 감동하였습니다.”제주 사람 생원 고득종이 말 3필을 바치니, 쌀과 콩을 35석 내려 주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인 1413년에 이미 생원시에 급제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고득종은 1414(태종 14) 알성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해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는 이력을 남겼다

고득종의 자는 자부(子傅)로 급제 후에 호조참의를 지냈고, 중추원부사일 때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승정원일기’의 김계륭 봉수 설치 상소.

고득종 외에 광산김씨 김계륭(金繼隆)이 있다. 김계륭은 제주 학문의 거목으로 알려지는 명도암 김진용의 아들이다

김계륭은 1663(현종 4) 진사시 3등으로 급제했고, 9년 후인 1672(현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김계륭은 급제 후 승문원 교검, 봉상시 주부, 벽사찰방 등을 역임했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김계륭은 1677년 봉상시 주부 재직 당시에 타국 선박이 들어올 만한 제주의 포구에 봉수대와 포대를 설치해 방비할 것을 건의,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미 제주를 통해 벨테브레(Jan J. Weltevree), 하멜(Hendrik Hamel) 등의 서양인이 표류해 들어온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계륭의 아버지 김진용도 이미 진사시에 급제한 경력이 있는 문향이 흐르는 집안이다.

‘국조방목(國朝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의 오섬
문과 급제 기록.

군위오씨 오섬(吳暹)만력43년을묘사마방목(萬曆四十三年乙卯司馬榜目)’국조문과방목의 기록에 따르면 자는 퇴지(退之) 또는 퇴이(退而)이며, 오몽열(吳夢說)의 아들이다

오섬은 1615(광해 7) 진사시에서 3등으로 급제했다. 그리고 1624(인조 2) 증광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오섬은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정책 대안을 제시해 문과에 급제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벼슬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호남 선비에게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을 돌렸고,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척후장이 돼 최전선에서 전공을 세웠다

관직으로는 선산부사와 보성군수, 장흥부사, 강원도감사, 성균관직강, 춘추관수찬관, 상의원정 등 외직과 내직을 두루 역임했다.

조선신사대동보에 그의 12세손인 오재방(吳宰邦)이 제주 영평리(제주시 영평동)에 거주하던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군위오씨는 제주시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위오씨에는 오정빈(吳廷賓)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는 1663년 정의현에서 오현(吳晛)의 아들로 태어나서, 1687(숙종 13) 진사시 3등으로 급제했다

이어 1707(숙종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급제 사실만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는 성균관 박사, 예조좌랑, 만경현령 등 다양한 내외 관직을 거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예조좌랑으로 재임할 때 박팽년 등의 사육신을 모신 사당에 사액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세조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반역죄로 처형됐던 사육신은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관작이 회복되고 사당이 건립됐는데, 오정빈은 이 사당에 임금이 내린 현판을 걸고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제주 출신 중 생원 진사시와 문과 둘 다 급제한 인물들은  고득종과 김계륭, 오섬, 오정빈 정도다

이렇듯 생원 진사시와 문과 둘 다 급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과거 응시자가 늘어날수록 급제의 문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생원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 바로 문과에만 응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현상이 지속될 수록 생원 진사시를 거치고 문과에 급제한 사람의 위상은 올라갔다

당연히 이들은 당시 제주 지역 사회에서 이름을 떨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들의 미래는 어땠을까? 이 상상을 바탕으로 이들을 배출했던 집안의 오늘을 조사해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해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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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창진(梁彰珍)은…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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