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도 없는 무차별 학살에 수습도 제대로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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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예비검속 명분에
모슬포 섯알오름서 62명 희생
사건 6년 지나 유족 시신 수습
만벵디 묘역 조성…46위 안장
제주시 한림읍에 위치한 만벵디 묘역 전경. 1950년 한국전쟁 예비검속 시 4·3가족이란 이유 등으로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조성한 묘역이다.

지난 두 달간 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을 따라 한림읍의 과거를 돌아봤다

이번 여정에서는 한림읍 역사문화 기행을 마무리하며 70년 전 한림에서 안타깝게 희생당한 영을 위로하고 아픔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한림의 과거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제주도에는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제주도의 서부지역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1950년 음력 77일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집단 학살돼 현재 갯거리오름 자락의 만벵디 공동장지(금악리 2754번지)’에 묻혀 있다

만벵디 공동장지의 희생자는 당시 한림과 무릉지서에 검속됐던 사람들로, 희생자 수는 62명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구금 장소는 당시 한림면 어업창고였다

만벵디 희생자들은 음력 77일 새벽 2시에 섯알오름 탄약고터 작은 구덩이에서 학살됐다. 몇 시간 후에는 큰 구덩이에서 모슬포지역에서 수감돼 있던 백조일손 희생자들이 학살됐다. 한림지역의 희생자 시신 수습은 1956330일 이뤄졌다

일부 유족들이 몰래 모여 칠성판이며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 3시경에 트럭으로 섯알오름에 가서 수습해 왔다

일부 시신은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찾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만벵디 공동장지는 다행히 유족 중 한 분이 무상으로 내놓았고 이곳에 46위가 안장됐다. 유족들은 메도, 술도, 벌초도 같이 하자‘7·7 만벵디유족회를 결성했다

2008년부터 백조일손 유족회와 함께 매년 음력 77일에 섯알오름 희생터에서 합동 위령제를 지내오다가 2016년부터는 각각의 묘역에서 제례를 지내기로 했다.

벵디()는 넓은 들을, (滿)은 가득하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북망산천 가는 곳으로 비유되곤 하는 만벵디()는 비가 내리면 물이 많이 고인다는 의미를 지닌 지역이라 전한다

이곳 주변의 많은 무덤 중에서도 4·3사건과 관련한 특별한 무덤군이 바로 1950년에 발생한 예비검속 희생자 집단묘역이다

만벵듸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시.

다음은 만벵디() 4·3묘역 표지석에 쓰여진 내용이다.

이곳 만벵디() 묘역에 안장된 영령들은 소위 예비검속에 의해 1950820(77) 새벽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무참히 학살된 원혼들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625)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사상이 의심스럽다, 4·3사건 당시 가족 중 누군가 희생됐다, ··관에 비협조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희생된 무고한 양민들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시신 인도를 간절히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아온 지 6년 만인 19563월에 시신 수습이 이루어져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20018월 제주도와 북제주군의 지원으로 위령비가 건립되고 묘역이 정비돼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희생자 수는 62명인데 현재 이 장지에는 46위가 안장돼 있으며 그 외는 개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200487·7 만벵디 유족회

한림읍 금악리 지경인 만벵디()에 묻힌 이들은, 옛 한림어협 창고에 갇혔다가 재판도 없이 대정읍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려가 즉결처형을 당한 제주선인들이었다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제주선인들의 시신은 군()에서 수습을 금지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방치돼 시신으로서의 존엄도 무시됐다. 사건발생 59개월 만인 1956년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으나, 시신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때의 학살을 보도연맹사건이라고 부른다. 전향한 좌익 전력자들의 관제조직인 보도연맹은, 과거를 반성하고 회개해 나라를 보위(保衛)하고, 새 조국 건설을 인도(引導)하겠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만들어졌던 관제조직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전쟁이 나자 이들을 몰살시켜버렸으니, 전국적으로 희생자의 수가 무려 30만에 이른다고 전한다

만벵디 묘역 위령비.

다음은 만벵디() 묘지의 위령비에 새겨진 강덕환 시인의 조시(弔詩)이다.

그대 기억 하는가 섯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모진 광풍에 쓰러지던 칠석날 새벽/ 부모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뼈마디 하나 겨우 추스른 주름진 세월/ 몇 번이나 새로 돋았을까 저 풀들/ 시퍼렇게 날 세우고 진초록 물결로/ 그 새벽 이슬길 몇 번이나 밟아 왔을까/ 옷은 얻어서 옷이고 밥은 빌어서 밥인데/ 얻지도 빌지도 못한 혼백 견우별, 직녀별로 피어올라/ 인연의 질긴 끈 놓지 못하는 사이/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햇빛에게 보태어/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 가진 것 비록 적어도 더불어 사는 넉넉함으로/ 평화의 불씨 당겨 점화하오니/ 혜원의 향으로 타오르십서/ 상생의 촛농으로 흘러 내리십서

한수풀은 한림의 옛 이름으로, 널따란 숲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무성한 숲은 사라졌다

반면 선인들이 일군 역사·문화는 고스란히 남아 후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곧 미래 산업으로 이어지는 시대다

역사문화 공유를 통해서 가야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걷고자 하는 길은 행복의 길이다.

 ‘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역시 행복의 길로 가는 한질이 되길 두 손 모은다.

다음 호부터 질토래비 역사문화탐방길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서귀포역사문화의길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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