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共感)
공감(共感)
  • 제주신보
  • 승인 202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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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드라마를 보며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린다. ‘주인공이 참 슬프겠다. 저렇게 처절할 수가.’ 공감의 눈물이다. 사람에겐 이처럼 타자의 운명적 상황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감능력이란 게 있다.

다시 말하면, 공감이란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나도 더불어 느끼는 과정을 의미한다. 다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인지적으로 이해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넘어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고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저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는 공감이 아니다. ‘저 사람은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저 상황에 처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 하는 건 공감이 된다.

측은지심이나 역지사지를 공감이라 보기 쉬우나 공감의 올바른 예시는 아니다. 내 입장에서 상대의 슬픔을 아는 게 측은지심이고, 내가 저 입장에 있을 때의 감정이 역지사지다. 둘 다 ‘나의 가치관’을 기준 해 상황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므로 상대의 마음에 깊숙이 닿지 않는다. 단절돼 공감하지 못한다. 그나마 역지사지는 안 하는 것보다는 할 줄 아는 게 인간관계에 도움이 될 뿐이다.

상대에게 공감능력이 없다는 식의 비난은 용이하다. 결국 공감이라는 말은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로 쓰이는 게 현실이다.

외면하기 쉬운 게 공감대 형성이다. 하루가 너무 길고 고된데 몇 장의 그림과 몇 줄의 문장만으로 일상에 단비 같은 웃음을 자아낼 수 있다면, 이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된 것이다.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공감이다.

공감대 형성의 장애요인은 격렬하게 상대를 설득하려는 강압적 태도다. 견강부회(牽强附會)로 누군가를 설득하려 억지를 쓰다 보면 말투부터 거칠어지게 된다. 천천히 부드럽게 말해도 될 것을 조급해 버럭 성내면 뒤틀려 상대도 의견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돼 버린다. 말할 때 상대의 감정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언변이 좋다고 현란한 말솜씨를 구사하는 건 능사가 아니다. 외려 자신을 다치게 하는 날선 창이 돼 돌아오는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이유이다.

전체 의사소통에서 언어적인 것은 7%에 불과하다고 한다. 몸의 자세, 신체 움직임, 눈 깜박임, 얼굴 표정 같은 신체언어에 의한 게 절반을 넘는 55%, 음성이 38%에 해당한다는 점에 근거해 이런 모든 통로를 사용한 라포 형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크게 공감하고 싶다.

라포(rapport)란 신뢰와 친근감으로 이뤄진 인간관계로 상호협조를 충족시켜 주는 동인(動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될 때 이뤄지는 게 공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매우 절실한 게 공감대 형성이 아닌가 한다. 서로 티격태격해선 신뢰와 담을 쌓게 된다. 못할 말로 상대에 상처를 주는 것은 공인의 금도(襟度)로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맥락도 없고 공감도 없는 말은 장본인에게는 재앙이고 타인에게는 폭력이다. 따지고 보면, 공감이란 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극히 보편적인 것, 아주 상식적인 것에 대한 이해, 바른 걸 바르다 하고 그른 걸 그르다 말하는 것, 그런 온당한 것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공감이 없으면 말은 빈말로 겉돌게 된다. 말이 겉도는 건 참으로 공허한 일이다.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다. 소통이 안되니 공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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