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적 고립이 중앙 진출의 또 다른 기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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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주지역 무과 급제자의 특징
무과, 문과·잡과 사이 위치로 인식
문치주의 조선에서 상대적 폄하돼
본관 잘못 등록·거주지 등록 많아
국방력 강화 위해 응시자격 확대
제주 무과 급제자 160여 명 기록
19세기 말의 관덕정과 목관아 외대문의 모습.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 군사들의 훈련청으로 창건됐다. 관덕정 뒤에 춘당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관덕정에서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임을 나타낸다. 춘당은 조선시대 임금이 몸소 나와 창경궁 춘당대에서 문무과의 시험을 치른 춘당대시에서 유래됐다. 출처: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과거 시험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적 장치였다. 그러나 과거의 종류에 따라 이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는 달랐다

무과는 이러한 인식에서 미묘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양반으로서의 계급 유지를 위한 문과와 생원 진사시, 중인으로서 관직 진출을 위한 잡과가 있다면, 무과는 그 가운데 정도 위치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조선은 글을 숭상하는 문치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유교 경전의 이해력과 시문 작성능력, 당면한 국가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내용인 문과와 생원 진사시를 더욱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다른 하나인 무과는 상대적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제주 출신 무과 급제자 분석을 통해 보이는 몇 가지 사례에서 이런 풍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제주지역 무과 급제자를 분석해 보면 제주지역 읍면의 명칭을 본관으로 하는 급제자들이 자주 보인다

공식적인 무과급제자 기록으로 볼 수 있는 무과방목에 기록된 제주도 무과 급제자는 다소 오차는 있지만 160여 명 정도다. 이들의 본관을 살펴보면 1624년 증광 무과에 급제한 이기륭(李基隆)의 본관은 제주로 돼 있다. 역대인물정보의 무과 급제자 정보에 제주이씨로 기록된 사람은 이기륭을 포함해 3명이다.

17세기까지 우리나라에 존재하던 성씨와 본관이 전체적으로 가장 잘 정리된 조종운의 씨족원류에는 제주이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20세기에 정부의 명으로 편찬된 증보문헌비고 47제계고에는 제주이씨가 원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1599년 급제한 김안방(金安邦)은 본관이 제주로 돼 있고 그를 포함한 3명이 제주김씨로 돼 있다. 그 외에 애월김씨와 일도김씨도 있다. 제주김씨는 씨족원류에는 등장하지 않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본관 명칭만 기록돼 있을 뿐 본관 지명의 유래나 성씨의 역사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증보문헌비고에 왜 이런 기록이 있게 됐을까? 증보문헌비고는 편찬 당시에 존재하던 각종 문헌을 참고해 수록 대상을 정했는데 무과방목 등의 자료를 보고 제주김씨를 적어 넣었을 수도 있다

1765년 식년 무과에 급제한 현익은(玄翼殷)과 현보만(玄寶萬)은 거주지는 정의인데 본관이 함덕으로 돼 있다. 함덕현씨는 위의 두 문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본관이 애월로 기록된 ‘갑자증광문무과방목(甲子增廣文武科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의 김강수 급제 기록.

이렇게 본관 명칭이 제주지역 지명으로 기록된 사례로는 김안방(제주), 김함(귀일), 안홍국(정의), 이정춘(제주), 이기륭(제주), 이희림(濟州), 김진성(제주), 김훈(귀일), 김강수(애월), 김반(제주), 김재형(일도), 현보만(함덕), 현익은(함덕), 강윤문(함덕) 등이 있다.

이들은 본관 명칭이 제주지역 지명으로 기록돼있는데, 모두 17세기 이후의 급제자들이다

이런 현상이 생긴 원인은 급제자가 거주하던 곳의 이름이나 급제자 부친의 고향을 본관으로 기재한 것 같다

사실 2015년도 인구주택 총조사 통계를 보면 제주이씨, 애월김씨와 같은 성씨본관은 현재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대한민국을 통틀어 전체 인구가 수백명 정도일 정도로 소수 성씨이다. 이 성씨들은 등록을 잘못했거나 거주지를 본관으로 기입했기 때문에 생겨났을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문과나 생원 진시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문과나 생원 진사시 응시자는 국가적으로도 본인을 포함한 직계 및 외가의 신분을 확인했기 때문에 불분명한 본관을 기재하기 힘들었고, 무과는 상대적으로 응시의 문이 더 열려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주 출신 무과 급제자 중에는 생원 진사시 급제 이력이 있는 가문과 혈연으로 이어진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생원 진사시는 그야말로 유교 경전과 문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무과와는 인연이 먼 것 같다. 한편 문무과를 고루 배출한 문중도 드물었다

제주 출신 과거 급제자들의 정확한 혈연과 혼인 관계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분석됐을 수도 있다.  제주도의 무과 급제자들은 글보다는 무예에 전념하던 집안들이었던것 같다.

사실 이런 특징은 제주도에서 치러진 무과만이 가지는 특징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 치러진 무과, 특히 조선 후기에 치러진 무과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른 지역에서 치러진 무과에는 평민 이름처럼 보이는 급제자들도 많이 보인다. 1637년 별시 무과 급제자를 보면, 안끝남(安唜男), 정끝동(鄭唜同), 옥글동(玉文里同)이라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주로 평민들이 붙이던 이름들로서 마지막에 겨우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끝동이’, 글을 잘 배워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글동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 같다. 이들은 과거를 보면서 이름을 한자로 적을 때, ‘’, ‘’, ‘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서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한 1637년은 병자호란 등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정은 국방력 강화를 위해 대규모로 무인을 선발했고, 이를 위해 무과 응시 자격을 양반의 범위를 넘어 평민에게까지 확대했던 것이다.

제주는 지역적 고립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차별을 받았다.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과거에 응시할 기회가 적었던 것도 의도하지 않았던 차별의 하나다

하지만 이것이 누구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지역적 불균형 해소를 위해 주기적으로 실시한 별시 무과에서 신분이 모호한 사람들이 무과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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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양창진(梁彰珍)은…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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