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共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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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김포공항에서 나와 올림픽대로를 지나다 보면 유난히 많은 까치집이 눈에 띈다. 가로수로 심은 회화나무, 느티나무와 벚나무, 메타세쿼이아에 둥지를 틀었다. 고수부지 공원엔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가 시골 강가처럼 친근하다. 그 풍경 속에 까치집이 있어 더 정겹다. 낮과 밤 꼬리를 물고 달리는 수많은 차량의 행렬, 소음과 매연으로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울 환경이 되질 않을 텐데 의아심이 들곤 한다.

한강 변이 연둣빛으로 찬연하고 연분홍 벚꽃이 강물에 일렁이는 봄, 한여름 푸른 수양버들의 낭창거림, 가을이면 자동차 바퀴에 휩쓸리는 고운 낙엽, 한겨울 눈발 휘날리는 날이면 나목 위 까치집이 회상으로 이어진다.

하늘을 향해 곧게 올라가던 고향 허드레 샘 곁 미루나무 우듬지는, 새벽안개를 가르며 떠오르는 해돋이를 맞이하고 해넘이를 늦게까지 잡고 있었다. 마을 이야기를 속속들이 지켜보며 옹기종기 까치집 서넛을 품었다. 비바람으로 허리가 꺾일 듯 요동을 쳐도 집이 부서지거나, 알을 놓치는 일 없이 키워 냈다. 서식지를 잘 옮기지 않는 텃새다. 해마다 헌 둥지를 고쳐 알을 낳는 알뜰한 지혜도 갖고 있다니, 그들의 건축 기술은 사람이 허물고 짓는 새집에 비할 바가 아닐 것 같다.

옛 시골의 한겨울은 눈이 많이 내려 꼼짝 못 하고 갇히게 된다. 동네는 왕래가 없어 적막감에 잠긴다. 아침 문틈으로 내다본 헛간 지붕 위에서 까치가 꽁지를 방정맞게 촐싹거리며 짖어대곤 했다. 오늘은 누가 오려나. 사람이 그립던 시절이었다.

가을이면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 몇 알 남길 만큼, 사람과 까치와의 사이가 친숙했다. 배려를 당연하다 생각했다. 들에 여물어 가는 곡식을 새나 까치가 휘젓고 다니며, 농작물을 해치는 일도 적었다. 잘 익은 감이나 대추를 쪼아 먹기는 해도 다들 그러려니 했다. 농약을 치지 않았던 때라선지 산과 들에 먹잇감이 풍부했으리라.

동물들이 점점 포악해지고 있다. 개체 수가 늘어난 데다 환경오염과 개발로 인한 서식지가 좁아져 먹잇감이 부족한 탓이다. 도심으로 먹이를 찾아 떼를 지어 내려오는 산짐승들에게 위협을 받게 되고, 몹쓸 병까지 유행시키고 있다. 까치와 꿩, 조류들은 후각과 미각이 발달한데다 영리하다. 수확을 앞둔 상품성이 높은 과일만 쪼아 먹는다고 농민들은 울상이다.

친근해 사랑을 받으며 이웃으로 살아온 까치도 골칫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어쩌다 사람과 동물이 먹이를 두고 다투게 되었는지. 활동할 영역이 점점 좁아지자 생존 터전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역공이 시작됐다. 앞으로 사람과 동물의 다툼이 더 심각할 것 같다. 뺏고 뺏기는 치열한 생존의 싸움, 애초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그들에게도 이 땅에서 누리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 동식물도 이 우주의 주인이다. 비록 미물일지라도 귀하지 않은 게 없다. 먹이는 곧 생존이고 종족을 번식시키는 것은 본능이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더불어 공존할 방법은 없을지. 인간으로부터 상처 받은 동식물이 허다하다. 몸에 좋다 하여 무분별한 남획으로 동물과 희귀한 약재가 수난을 겪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깊은 산과 무인도에서 마구잡이로 캐내는 대물이라 부르는 약초. 머지않아 영구히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들이다. 자연의 질서를 훼손시키는 것은 인간에게 다가올 큰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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