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로부터 서귀포를 지켜준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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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서귀진성과 남극 노인성
천지연 상류서 솔동산 동쪽 이동
군사 100여 명 주둔…지역 방어
집수정, 정방폭포(정모시)서 물 끌어 사용
장수의 별 ‘노인성’, 수성 별칭도
1590년(조선시대) 이옥 목사에 의해 설치된 서귀진성 모습. 서귀진성은 1439년 한승순 목사가 쌓은 뒤, 이옥 목사에 의해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서귀진에는 성정군 68명, 목자와 보인 39명 등 100여 명이 주둔했다.

이번 주부터는 신비로운 풍경을 따라 선조들의 문화와 역사가 깃든 서귀포시 역사문화길 탐방에 나선다.

서귀포시 탐방길 첫 여정에서는 조선시대 제주 방어시설인 서귀진성과 영주십경 중 하나인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서귀포 밤을 환하게 밝히는 남극 노인성을 따라가본다.

서귀진성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41폭 중 하나인 서귀조점(西歸操點)은 서귀진성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병기 등을 점검하는 모습이다

서귀진성은 서귀포시 솔동산 동쪽 지역인 서귀동 717-1번지 주변에 위치해 있다. 서귀진성은 조선시대 제주 방어시설인 39진 가운데 서귀포 지역 방어를 담당하던 유적이다

1439(세종21) 목사 한승순은 잦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천지연 상류에 있는 홍로천 위에 서귀진성을 쌓았다. 이후 이옥 목사가 1589(선조22)1592년 사이 현재의 장소로 옮겨 쌓았다. 당시 서귀진에는 성정군 68, 목자와 보인 39명 등 100여 명이 주둔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842년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에 의하면, 정방연에서 이곳까지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들여 저장했고, 남은 물은 주변의 농토를 이용하여 논농사를 짓도록 했다. 2010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수로와 우물 유구가 확인돼 2013년 우물 등을 수리했다

1873년에 편찬된 김성구 판관의 남천록에 따르면, 서귀진은 성곽 규모가 둘레 233m, 높이 2.8m로 동서에 두 개의 성문과 객사, 무기고, 군관청, 창고 등 11동의 건물이 있었다. 탐라순력도의 서귀조점(西歸操點)에도 당시의 성곽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1901년 서귀진성이 폐지된 이후, 서귀포 축항 시 일부 성담이 헐렸고, 관아 건물은 서귀공립심상소학교 등으로 개조돼 사용됐고, 4·3사건 때는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서귀진성 성곽을 헐어내 동네 주변의 성을 쌓는 데 이용됐다

이후에는 집의 울타리나 밭담으로 활용되면서 대부분 훼손됐다. 2000년 제주특별자치도지정문화재(기념물 제55)가 된 서귀진지는 이후 부지 등을 매입해 2013년 서귀진성 사적화 사업에 따라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됐다

 

서귀진 집수정.

서귀진 집수정(集水井)의 원류를 찾아서

1995년 국가지정 명승 제43호로 지정된 정방폭포 지역은 한라산 남사면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는 하상 용천수가 발달한 애이리내 즉 동홍천이 해안절벽과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폭포수가 직접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폭포다. 주상절리가 잘 발달된 해안절벽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25미터의 물줄기가 서귀포 바다의 푸른 절경과 어우러져 이루는 장관은 영주십경의 하나로 정방하폭이라 한다. 특히 여름의 폭포수가 시원하여 별천지에 있는 듯 하다는 의미이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41폭의 하나인 정방탐승(正房探勝)이 상징하듯,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서복일행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서복일행이 불로초를 구하러 제주에 왔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암벽에 새겼다는 전설이 만들어지고, 이로 인해 서귀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조면안산암으로 구성돼 있는 정방폭포의 해안절벽 근처 일대는 주상절리가 잘 발달돼 해안침식에 의해 절벽이 만들어졌다. 바위 주변과 해안선 주변 바닥에서는 조면안산암의 불투수층 역할로 지하수가 뿜어져 나오고, 이로 인해 자연적으로 폭포가 형성됐다. 정방폭포라는 이름은 폭포 상류에 위치한 정모시라는 용천수인 상수원에서 유래한다

오래전부터 정모시 주변에서는 수많은 곳에서 지하수가 용출하여 사방팔방으로 물줄기가 흘러가는 물의 도시를 방불케 했다. 선인들은 이곳에서 여러 수로를 만들어 서귀진성까지 연결해 집수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곳 주변을 거닐면 이곳이 바로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서린 곳임을 확인할 수 있어 더욱 좋다

다음은 서귀진성에 세워진 집수정 및 수로에 대한 안내 내용이다

서귀진 집수정은 축성 당시 성에 주둔하는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수로는 정방폭포 상류에 있는 정모시(正毛淵)에서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물길을 말한다. 성 동쪽 아래로 구멍을 뚫어 집수정까지 물을 끌어다 썼는데, 사용하다 남은 물은 성 서쪽 밖으로 내보내어 논농사를 짓도록 했다. 2010년 서귀진 2차 발굴조사 때 확인된 집수정은 바닥이 목조로 조립돼 있었고, 수로는 잡석을 쌓아 만들었다. 서귀포시는 2013년 서귀진 터를 정비하고 수로 일부를 수리하며 발굴조사 때 확인된 집수정을 원형 그대로 남겨두고 그 위에 83센티 두께의 흙을 덮고 나서 모형을 만들었다

탐라순력도 41 화폭 중의 하나인 서귀조점(西歸操點).

서진노성과 장수의 별 남극성

영주십경으로 유명한 매계 이한우(조천읍 신촌리 출신)는 용연야범(龍淵夜帆)과 서진노성(西鎭老星)을 더해 영주12경으로 품제하기도 했다. 서진노성은 서귀진성에서 노인성인 남극성을 보는 사람은 장수한다는 속설을 반영한 4자성어이기도 하다

탐라순력도 41개 화폭 중 제주양노, 정의양노, 대정양노의 그림은 80세 이상의 노인잔치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100세 이상 노인들도 그림 속에 등장한다

제주선인들은 사람의 수명을 하늘이 정한다 하여 인명재천이라 했다. 그런 염원을 담아 하늘의 별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서귀포시 삼매봉에 있는 남성대(南星臺)는 그러한 제의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성대는 제주선인들이 남극노인성을 바라보던 곳으로, 남극노인성은 겨울철에만 볼 수 있는 별로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은 별이다. 북반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별이라 이 별을 보는 사람들은 장수를 누리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수성(壽星)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는 노인성이 나타날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노인성이 유난히 잘 보이면 큰 연회를 열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노인성이 떠오르자 왕이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조선시대에도 노인성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 등 유배객들의 글에도 노인성이 자주 등장하며, 추사가 머물던 처소를 그의 제자인 매계 이한우는 수성초당이라 이름 짓기도 했다

이처럼 중요시 여긴 무병장수의 상징인 노인성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한라산과 삼매봉이다. 삼매봉 남성대에는 별을 통해 무병장수를 꿈꿨던 제주선인들의 소망이 담겨있는 셈이다. 남성(南星)은 남극노인성을 일컫는다. 노인성은 예부터 장수의 별로 통칭된다. 카노푸스라는 학명의 항성(恒星)으로 춘분에 떠서 추분에 진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노인성에 대한 문화를 살리고자 2010년대부터 춘분 때에 맞춰 서귀포시 남극 노인성제가 이중섭미술관 주변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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