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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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 수필가

봄빛이 완연하다. 가끔 나가는 공원에도 마른 가지마다 물이 올라 오종종 꽃봉오리가 눈을 뜰 차비를 하고 있는가 하면, 꽃잎을 배시시 열고 봄맞이를 서두는 들꽃도 보인다. 높낮이 없이 싹둑 가지치기를 해서 볼품없어진 매화나무에도 금방이라도 터질듯 발그레한 얼굴을 숨기고 있다. 나무의 습성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지 매화나무 밭을 지날 때면 모질게 잘라버린 누군가를 탓했는데, 무수히 솟아오른 꽃봉오리에는 봄이 가득 담겼다.

무르익어가는 자연의 순리 안에서도 연일 보도되는 바이러스감염 소식은 마음을 어둡게 한다. 뒤숭숭한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밀려둔 잡다한 집안일이며 마을도서관에 갖다주려던 책을 정리하고, 겨우내 걸치고 다녔던 두꺼운 옷들을 손빨래해서 들여놨다. 나름의 봄맞이를 마쳤는데 갑자기 찬바람이 몰아치며 눈이 내렸다. 우수를 이틀 앞두고 내린 올 겨울 첫눈은 봄인가 눈을 뜨던 살아있는 것들에게도, 눈을 맞으며 걷던 소싯적 낭만을 기억하는 노년에게도 꿈꾸듯이 내렸다.

다시 따사로운 봄볕이 베란다를 가득 채우던 날, 지난해부터 미루던 분갈이를 할 요량으로 하나하나 살피다보니 말라비틀어져서 죽은 줄 알았던 시클라멘에서 뾰족하니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 철 거실에서 꽃으로 살다가 시들어버리자, 버리려고 놔둔 것인데 내가 모르는 어디에 생명이 숨어있던 것일까.

겨울에서 봄 사이 연례행사처럼 병원에 입원했던 남편은 올해는 무사히 지나가나 싶었는데 덜컥 수술을 하게 되었다. 지병이 있는 사람은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몸으로 감지하는지 봄이 가까워오면 어딘가에서 탈이 난다. 아픔과 동행하는 삶도 버거운데 시련은 끝도 없이 찾아든다. 이젠 병원이라면 넌더리가 날 정도지만, 제발이라는 간절한 기도만이 이겨내는 길이겠거니 주문을 건다.

여느 때와 달리 문병 오는 사람들을 차단한 병실은 조용하면서도 무료하다. 수시로 TV를 통해 듣는 코로나19 감염자가 불어나는 소식이 가장 큰 관심거리. 소통이 없는 환자들도 그 뉴스가 나올 때면 걱정이 되는지 한마디씩 보탠다. 이곳도 비상시를 대비해서 웬만한 환자들은 퇴원시키고 병실을 확보해 두었다. 그런저런 처리과정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끼긴 해도 환자나 보호자나 어서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기를 묵묵히 바라며 밥상을 받고 약을 먹고 잠을 청한다.

오늘 아침에도 병실 밖 장례식장에선 운구차가 연이어 나가고 있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과 이별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래도 맑고 따뜻한 날이어서 다행이라고 웅얼거리며 한모금의 커피를 삼키고 달력을 본다.

달포 만에 돌아온 집은 곳곳에 스며있던 우리의 체취로 반겨준다. 날마다 병실의 작은 침상에서 웅크리고 자는 동안에도 나의 베란다 식물들은 열심히 자라고 있었다. 뾰족하니 올라온 싹만 보였던 시클라멘도 동글동글한 잎사귀가 다섯 장이나 올라왔다. 서둘러 버렸다면 잃어버렸을 생명, 고맙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시간, 기운 없이 앉아있는 그에게 옹골차게 살아난 시클라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오는 장날에는 꽃모종을 사러 같이 가자고 약속한다.

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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