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무소 문 열리자...의용군 강제징집 이어 北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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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추가진상조사보고서 발간, 경인지역 4.3수형인 기구한 운명 드러나
4·3당시 무고한 양민들이 형무소로 끌려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동상이 제주4·3평화공원에 설치된 모습.
4·3당시 무고한 양민들이 형무소로 끌려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동상이 제주4·3평화공원에 설치된 모습.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는 2003년 정부의 4·3진상보고서 발표 이후 17년 만에 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를 16일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경인지역에서 옥살이를 했던 수형인들의 기구한 운명과 사연이 소개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북한 인민군이 서울·인천지역을 점령하면서 서대문·마포·인천형무소는 문이 열렸다.

이곳에 수감된 4·3수형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의용군에 편입돼 전장에 투입되거나 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갔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4·3수형인들 중 탈옥수 명부에 있는 309명 중 대다수는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고(故) 김상년씨는 형무소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의용군에 강제 편입됐다. 그는 1950년 9월 28일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경찰에 연행됐고, 이어 국군에 입대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마포형무소 수형인 중 2명은 북으로 넘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와흘리 출신 김모씨는 2009년 이산가족 상봉으로 생존 여부가 확인됐다.

인민군이 서대문형무소를 장악하면서 이곳에 있던 4·3수형인 중 여성 70명은 1950년 8월 중앙여맹 주도한 궐기대회에 참석했다.

이들 여성 대다수는 인민군 치하에서 집단 활동을 하다 월북되거나 행방불명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생사를 몰랐던 양모씨(당시 20세·여)는 그의 아들이 2014년 탈북하면서 북에서 생존한 사실이 확인됐다. 탈북한 아들을 통해 양씨의 숙부는 평안남도에 거주한 것도 밝혀졌다.

인천형무소는 인민군이 오기도 전에 교도관들이 퇴각, 250여 명의 4·3수형인들은 각지로 흩어졌으며 일부는 무리를 지어 수원 방향으로 갔다가 의용군에 끌려가거나 국군에 체포됐다.

인천형무소는 10대 소년들이 주로 수감됐다. 양모씨(당시 16세)와 박모씨(당시 18세)는 의용군에 끌려가서 지리산 등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국군에 생포돼 거제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이들은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둘 다 징집영장이 나오면서 이번에는 국군 장병으로 복무해야 했다.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한국전쟁 당시 4·3관련 전국 수형인은 불법 군사재판으로 수감된 2350명과 일반재판 수형인 200여 명 등 2500명이 넘었지만, 대다수는 고향에 오지 못하고 집단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며 “향후 지속적인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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