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교육자·화가·행정가·방송국장으로 제주 발전에 기여
(127) 교육자·화가·행정가·방송국장으로 제주 발전에 기여
  • 제주신보
  • 승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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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옥, 민족종교 항일 운동
 김인종, 육군대장·2군 사령관
 김인지, 방송국장·시장 역임
 김인택, 조선 말기 대정현감
 김인화(여), 대운동회 우승
 김인화, 북제주군수 등 지내
 김일영, 한문서당 항일활동
1955년 서울중앙방송국 관계자가 제주방송국의 순시를 마친후 방송국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앞줄 오른쪽 둘째부터 김인지 제주방송국장, 서울중앙방송국 관계자, 길성운 제주도지사, 양원평 과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인옥金仁玉1873(고종10)~1958(분단초기), 무극대도교의 항일활동

본관 경주, 김여수金麗水의 아들로 산남 호근리<호근이-머들>에서 태어나 한때 민족종교인 보천교를 믿었다

193611월경 강석구姜錫龜(58·봉개)의 권유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믿게 돼, 1940124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인종金仁鍾1945~생존. 대정읍 상모리 출신, 대정고 10회 졸, 육사 24기 졸, 육군대장, 2군 사령관

김인지金仁志1907(광무11)~1967, 교육자, 화가, 행정가, 제주방송국장. 본관 광산

남제주군 중문면 하예리<열리> 태생으로 1925년 제주농업학교 3학년을 졸업하고, 중문교, 서귀교, 전남 몽탄교夢灘校, 제북교 교사를 역임하고 193911월에 제주농업학교 미술과 강사로 출강했다

작품 활동으로는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작품 를 가지고 입선, 이는 전라남도 도내에서 처음이다

1936년 제2회 선전鮮展에서 작품 서귀포가 입선되고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 작품 해녀가 입선됐다

광복 후 제주북교 교장을 거쳐 1947년 제주도 총무국 학무과장을 역임했다.

19482월 제주북교에서 본도의 풍물화風物畵 30점을 가지고 개인전을 개최했다

195011월 제3대 제주방송국장으로 부임해 19614월까지 10여 년을 재임했다

특히 재임 중 1952916일 한라산 무장대 6명이 제주방송국을 습격해 방송과장 김두규金斗奎(31), 기술견습직 채종식蔡鍾植(18), 노무직원 김석규를 납치, 사살한 것이 920일 경찰수색대에 의해 확인됐다

1955224일 제주도미술협회를 미공보원에서 개최해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19614월 북제주교육구 제3대 교육감에 당선됐지만 1개월여 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교육자치제가 폐지되며 물러났다

19633월 제주시장으로 임명돼 시정市政에 임했다

19961월 제주방송인클럽이 제정한 제1회 제주방송인 대상大賞을 수여한 바 있다.

김인택金仁澤생몰년 미상, 대정현감. 1817(순조17) 6, 모달겸牟達兼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204월에 떠났다

이와 함께 김인택은 대정객사를 중창했다

이 객사를 영안관瀛安館이라고도 하는데 언제 처음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11년 대정공립보통학교大靜公立普通學校가 그 곳에서 개설됐다

1817년 대정 유생으로서 의사인 구제국具濟國·양위경梁渭慶의 집안을 복호復戶했다

와 양은 홍경래난洪景來亂을 평정할 목적으로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출륙하려던 중 진압됐다고 해서 이를 중지했다

1940년 시민대운동회 릴레이 경주에서 우승한 용진회勇進會 여자 선수들.(앞줄 김인화, 뒷줄 왼쪽부터 박순길朴順吉, 문안옥文安玉, 문금순文錦順)

김인화金仁花()생몰년 미상. 제주시 건입동 릴레이 선수 주장.

김인화金仁和생몰년 미상. 애월읍 금성리출신

제주농업학교 졸업(35). 북제주군수, 제주도 산업국장, 제주도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인산난심청운仁山蘭心靑雲재단()을 설립했다

김일화김원화의 친형이며 대동주식회사 회장 김규진金圭珍의 선친이다

 김일영金日榮1852(철종3)~1936(일제강점기), 한문서당의 항일활동. 대정향교 도훈장. 자는 권삼權三, 호는 제남濟南, 본관 경주. 대정읍 신도리<->태생이다

아우 김일해金日海도 도은桃隱 선생이라고 하여 흔히 형을 신도 큰 훈장 혹은 모루-훈장, 아우를 신도 작은훈장 혹은 무드-훈장이라고 불렀다

김일영의 아우 김일해는 대정향교의 도훈장을 역임하고 제주시 용강리<무드->에서 오래 훈학, 시문에도 능했다

신축년(1901) 대정 유림이 일본세日本勢·불국세佛國勢에 저항하는 봉기가 있었다. 이는 일본어선이 대정 해안에서 노략질하는 데 대하여 유림의 분노와 맥을 같이 한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 있는 김일영金日榮기념비.

김일영은 말년에는 향리에 재래식 서당을 개설해 강한 민족 주체성과 외세 배격이란 두 축을 내용으로 하는 훈학을 실시했다

동향의 항일운동가 좌행옥左行玉과 김익휴金益休도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김일영의 문학생들은 그 뒤 오랫동안 스승의 애국계몽사상에 감화되어 지속해 나갔다. 큰 훈장은 산북 귀덕, 신창, 조수, 고산, 청수, 용수, 저지, 금릉, 명월, 무도 등지와, 또 산남의 신도, 무릉, 의귀 등지에서 초빙되어 훈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일영이 타계하고 3년 상을 마치자 문하생들이 모여 제남선생濟南先生 도훈장都訓長 김공일영金公日榮기념비1938년 신도 마을 서북쪽 신작로 길가에 세웠다

마침 비문 상단에 음각된 태극 마크 표시가 배일사상을 고취한다고 하여 일경에 의해 문제시됐다. 일제는 비를 세운 주동 인물들을 조사한다거나 미행을 일삼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태극 마크 없는 새로운 비를 만들어 세우기로 하고 문제가 해결됐다

불온시하던 비석은 철거해 현재 증손의 집에 보존 중이다. 신도리 마을에는 유명한 항일인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들의 항일활동의 연원에는 김일해의 훈학에 있었다

김일해의 한시 방우放牛를 보면 農家勤業迨閒時농가에 한가로울 때에/爾放池畔任所爲네가 못가에서 방목하더래도/莫向齊城城下去제나라성 성밑으로 가지 마/吾聞田將用兵奇전장군의 기특한 용병술을 들었소/라고 읊었다

이는 전단화우田單火牛의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연나라를 일본에 비유하여 자기의 문하생 중에서 전단 장군과 같은 이가 나와 기특한 계략으로 일본을 망하게 하리라는 비유를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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