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자연의 아름다움 속 만나는 역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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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새연교와 범섬
새연교, 고기잡이 배 형상화
호랑이가 웅크린 모습, 범섬
목호의 난 평정된 역사 현장
용왕신 제 지낸 장소 할망당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새연교 주변 풍경. 새연교는 제주의 전통 고기잡이 배인 테우를 형상화해 만들어진 다리다. 그물을 넓게 펼치는 모양과 고기를 가득 실은 테우가 돛을 달고 서귀포항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서귀포 바닷가에 서면 맛과 멋이 색다르게 다가오면서 삶의 희열을 느낀다. 태평양의 넘실거리는 파도가 막혔던 가슴을 뚫어놓기도 한다. 평온한 마음이 되어 지척에 있는 새연교와 조금 멀리 앞바다에 떠 있는 범섬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새연교와 범섬의 풍경을 따라 걸어보고 이 아름다운 풍경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살펴본다

천지연 새연교

제주시에 용연 구름다리가 있다면 서귀포에는 새연교가 있다. 두 다리의 공통점은 용연과 천지연이라는 자연 연못 주변에 빼어난 절경과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계곡물이 바다로 빠져 가는 지점에 축조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새연교는 천지연 폭포수가 흘러 내려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서귀포항과 지척에 있는 무인도인 새섬을 연결해 보다 풍부한 볼거리와 생태체험을 즐기게 해준다

외관 면에서도 독창적인 이 다리는 제주의 전통 고기잡이배인 테우를 참고해 형상화한 것으로, 그물을 넓게 펼치는 모양과 고기를 가득 실은 테우가 돛을 달고 서귀포항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고 한다

새섬은 억새풀인 새()가 많아서 새섬으로 불렸는데 한자로는 초도(草島) 또는 모도(茅島)라 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이 날아다니는 새의 뜻인 조도(鳥島)로 잘못 표기하는 바람에 조도로 불리고 있으나, 한자로는 모도(茅島)로 표기하는 것이 섬의 특성에 맞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과거에는 유인도였던 이 섬은 1965년 이후 무인도가 됐다. 난대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새섬에는 자연학습과 생태체험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하게 시설들을 구축돼 있다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에서 바라본 범섬.

범섬 그리고 목호의 난과 최영 장군

이곳 패류화석산지 서쪽으로 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범섬은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을 닮았다

섬 주위에는 크고 작은 해식동굴들이 있는데 같은 크기로 나란히 생긴 두 개의 해식동굴을 호랑이 콧구멍이라 하고, 반대쪽의 커다란 해식동굴을 호랑이 똥구멍이라 불리기도 한다

섬 위쪽은 평평하고 남쪽 가장자리에서는 용천수가 솟아 1950년대까지 가축을 기르고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사람이 살았다. 섬 남쪽에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바위투성이지만 북쪽에는 돈나무, 구실잣밤나무, 해송 등이 울창하다. 특히 난대성 식물인 박달목서라는 희귀종 1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상록활엽수림과 함께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가 서식하고 있어 섬 전체가 제주도지정 문화재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더욱이 범섬은 제주의 아픔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역사 증인과 같은 섬이기도 하다

목호정벌을 위해 명월포(한림읍 옹포)를 통해 제주에 상륙한 최영 장군 부대(314척의 전함과 25605명의 군대)는 새별오름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밀린 목호군 수뇌부 석질리필사와 관음보 등이 범섬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그들을 쫓기 위해 최영 장군은 범섬 앞 법환포구에 군막을 쳤다

작은 섬이지만 해안에서 1.3나 떨어져 있고, 배 붙일 곳 없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을 공략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서 숙영하며 공격방법을 찾았던 최영장군 일행은 결국 전함 40척을 이어 묶어 범섬으로 건너가 목호군을 격퇴했다

최영 장군은 외돌괴 전설을 낳을 만큼 특별한 병법을 동원해 출정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하여 이후 법환포구에는 막숙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범섬과 최단 거리로 배를 연이어 묶은 지점을 배연줄이 또는 배염줄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최영 장군이 외돌괴와 법환포구의 지형을 이용해 배연줄이라는 곳을 거쳐 군사를 이끌어 직접 범섬을 압박해 들어가자 목호의 수뇌부인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석질리필사는 처자식과 함께 항복했다. 최영 장군은 항복한 석질리와 아들 3명을 목 베어 죽이고 자살한 수뇌부의 시신을 찾아내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역사는 범섬을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몽골 지배 100년을 마무리한 현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를 살았던 제주 선인들에게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살육과 희생을 거쳐 지배 세력이 교체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벼락마진듸 조형물 바로 아래 해안도변에 조성된 할망당 조형물.

벼락마진듸 할망당 조형물과 해신당

서귀진성에서 100m 떨어진 서쪽 높은 지역에는 벼락마진듸라는 할망당이 있다. 서귀포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인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용왕신을 모시며 제의를 행해왔다

당시의 신목은 소나무로, 둘레가 7m에 이를 정도로 우람했었다. 1919년 즈음 신목인 소나무가 벼락을 맞았는데, 이런 사연으로 이곳을 벼락마진듸라고 부른다

정자 조형물이 세워진 이곳에는 제를 지내던 당집(초가)이 있었다. 지금은 벼락마진듸 조형물 옆으로 난 새로 조성된 테크길 아래로 내려서면 해안도로 변을 만난다. 바로 해안도로 옆에 있는 팽나무를 신목으로 하여 자그마한 당집에서 당신(司堂王船)을 모시고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단골들은 여러 조형물로 치장을 한 이곳을 할망당 또는 용왕당이라 부르며 치성을 드리고 있다. 2002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환경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관계기관에서는 지역주민들의 삶의 애환이 서려 있는 이곳을 정비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으로도 마련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성한 성소였던 이곳에 250년이 됨직한 신목인 소나무가 용왕당(요왕당)을 찾는 단골들을 포근히 맞아주는 듯 푸르름을 잃지 않고 서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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