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제주 전역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합창
(128) 제주 전역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합창
  • 제주신보
  • 승인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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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준, 농민조합운동 활동
 김일해, 제주 명하사로 칭송
 김임형, 일제 학생 항일운동
 김잉희, 제주간호전문대학장
 김자정, 고려 시기 친종장군
 김장환, 조천만세운동 가담
조천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3월 1일마다 조천만세동산에서 재연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2018년 펼쳐진 재연 행사 모습. 조천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이어졌다. 김장환은 숙부인 김시범과 조천만세운동에 가담, 징역 8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일준金日準1911(일제강점기)~1960(분단초기), 독립운동가. 제주도 함덕리의 추도비문에 따른 항일활동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항일활동 등을 펼쳤다

호는 훈재(薰齋)이고 본관은 경주다. 김완경(金完京)의 아들로 산북 함덕리 태생이다

서울의 사립 중동학교에서 수학, 1930년 봄 도쿄에서 공산주의에 찬동하고 조국 해방을 다짐했다

1937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다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19908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일준(金日準) 외 6명의 항일기념비(함덕리 마을 안).

김일해金日海1858(철종9)~?, 문인. 호는 도은(桃隱). 본관은 경주다

대정현 도원리(현 신도리)에서 태어났고, 제주의 명하사(名下士)라 칭송됐다

주경(州境) ‘무드-에서 오래 훈학하고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그 중 제주향교 직원 현승규(玄昇圭)가 뛰어난 제자이다

특히 시작이 뛰어나 제주 향시의 시관으로 여러 번 초청됐다

그의 문인 부완백(夫完伯) 옹이 회자되던 시 몇 편을 기억하고 있다.

김임형金林瀅1915(일제강점기)~1949(분단초기), 학생 항일운동가.

본관은 김해. 김홍지(金洪祉)의 차남으로 구좌읍 세화리 -태생이다.

19324월 경성사립협성실업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때에 사립 경신학교로 전학한 후 다시 사립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고등과에 입학해 1년 재학한 후 퇴학됐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9344월 만주 용정시(龍井市) 사립 동흥중학교 3학년에 편입해 193534학년을 수료했다

19354월 사립 경성공업학교에 편입학, 19383월 졸업했다

19381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다.

김잉희金仍熙1919~2018, 애월읍 애월리 출신, 제주간호전문대학장.

김자정金子廷생몰년 미상, 고려 무신.

충렬왕 때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 제주에 파견됐다

1268(원종9) 임연(林衍)이 권신 김준(金俊)을 살해할때 모의에 가담해 아우 김자후(金子厚)를 시켜 김준의 아우 김충(金沖)을 죽이고 그 일당들을 해산하게 했다

김준의 종자 등이 변을 듣고 들어가 김충를 구원하려고 했지만, 김자정이 궁문에 당도, 왕지(王旨)라 칭하면서 물리쳤다

이듬해 세자 심(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온 뒤 대장군이 되었다

1277(충렬왕3) 친종장군이 되어 방수군을 인솔하고 탐라에 부임함으로서 환관으로는 처음으로 지방에 출사했다

이듬해 장군 차득규, 지후 윤해(尹諧)와 더불어 별감이 되어 감찰별감과 함께 태부의 세입을 여러 가지로 조사해 경비를 줄이려고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79년 사패를 사칭해 점령한 전토를 신흥창(新興倉)에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 뒤 1281년 정조사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1285년에 상장군으로 동경부사가 되었다.

김장환金章煥1902(광무6)~?(분단시대),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본관 김해. 선각자 김시학(金時學)의 장남으로 조천리 태생이다

김장환은 1919321일 숙부인 김시범과 함께 조천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19194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이 선고되어 공소하자 같은해 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 유학해 사립 휘문고보에 재학 했다. 결혼한 후 서울 수창동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겨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192583일 서울 서린식당에서 14개 청년단체의 대표 50명이 모여 경성 부근 청년단체연합회 기성회가 조직됐다. 이때 기성위원 19명에 그도 뽑혔다

1934년 부인이 사별하자 평양 태생 김혜원(金惠媛)과 재혼한 후 1944년 평양시 내수정으로 다시 거주지를 옮겼다.

1945년 조국은 광복됐지만, 38선으로 남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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