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사판 분실 이유로 각급학교 교사들 총살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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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2주년 기획) 제주교육계 피해 실태...교사.학생 700명 희생
1948년 겨울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한 옛 성산초등학교 전경. 특별중대는 학교 옆 감자창고를 유치장으로 사용, 수감된 주민들을 고문한 후 학살터로 끌고 갔다.
1948년 겨울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한 옛 성산초등학교 전경. 특별중대는 학교 옆 감자창고를 유치장으로 사용, 수감된 주민들을 고문한 후 학살터로 끌고 갔다.

4·3의 광풍은 교육계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72년 전 도내에는 초등학교 96곳, 중학교(6년제) 17곳이 있었다.

4·3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교사 271명, 학생 429명 등 모두 700명이 숨지거나 행방불명됐고, 학교시설 93곳이 파괴되거나 전소됐다.

학교별 희생자는 교사·학생들 사이에 이념적 갈등이 심화됐던 제주공립농업중학교(현 제주고)가 6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정공립초급중학교(현 대정중) 51명, 서귀초급중학교(현 서귀중) 36명, 단국중학교(하귀중학원·폐교) 35명 등이다.

▲등사판 하나에 교사 목숨 달려=군부대가 주둔했던 학교마다 등사판을 분실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이 처형당했다.

철필로 긁어 쓴 글씨를 잉크 롤러로 밀어서 복사는 등사판은 삐라(유인물)를 만드는데 이용되면서 무장대는 학교를 습격할 때마다 이를 훔쳐갔다.

1949년 3월 김녕초등학교 강중빈·이응우 교사 2명은 학교에 등사판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이곳에 주둔했던 2연대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난산초등학교 강인식 교장은 1948년 11월 무장대가 등사판을 훔쳐갔다는 이유로 3년 형을 선고 받고 목포교도소 수감 중 행방불명됐다.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초등학교에서도 등사판을 무장대에게 제공한 혐의로 김영택 교장을 포함, 인근 학교 교사 등 7명이 성산포 터진목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위미초등학교는 등사판이 사라지자 교사들이 위미지서로 불려가 일주일간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그 배후에는 서북청년단 출신 교사가 있었다.

▲교단의 빈 공백 서청 출신 교사 차지=일본 유학 후 1946년부터 대정중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쳤던 교사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4·3당시 무장대 총책(총사령관)에 오르면서 이 학교 학생들은 토벌대의 감시 대상이 됐다.

대정중은 학생 48명이 토벌대가 끌려가 처형되거나 입산 후 행방불명됐다.

4·3사건의 단초가 된 1947년 3·1절 경찰 발포사건 이후 3월 10일에는 관공서를 포함 민·관이 총파업을 했다. 교사들은 구속되거나 수배령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교단은 공백이 발생했다.

그 빈자리는 이북 출신들이 채워갔다. 김달삼이 교사로 있던 대정중은 한 때 제주 출신보다 이북 출신 교사가 더 많았다.

1948년 12월 장전초등학교는 무장대들의 붉은 기가 올라가 있었던 책임을 물어 장순하 교장이 토벌대에 끌려갔고, 주민들의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다. 이 학교 교사 김봉수는 군인들의 암호를 제대로 대지 못했다는 이유로 희생됐다.

▲학교를 유치장과 학살터로 이용=4·3당시 일부 학교는 군부대가 주둔했고, 무장대의 습격으로 전소돼 학적부와 졸업대장 등이 소실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성산초등학교는 군복은 입었으나 계급장은 달지 않은 서청 특별중대가 주둔했고, 학교 옆 감자창고를 유치장으로 사용해 양민들을 수감, 고문과 처형을 단행했다.

제주공립농업중학교의 교사(校舍)와 운동장은 미군과 토벌대가 함께 주둔했으며, 북쪽 운동장은 연병장으로, 남쪽 운동장은 포로수용소로 사용됐다.

1948년 10월 9연대는 천막 10여 동을 설치, 임시수용소를 조성했는데 수용자가 넘쳐나면서 1948년 일시 휴교를 단행했다.

학교 건물 피해 현황을 보면 방화로 인한 전소 43곳, 건물 해체 6곳, 부분 소실 2곳 등이다.

토벌대가 주둔한 학교는 32곳, 학살터로 이용됐던 학교는 16곳, 양민을 감금한 학교는 28곳에 이른다. 4·3 전개 과정에서 학교 29곳은 임시 폐교됐으며, 5곳은 통합됐다. 4곳은 폐교되면서 사라졌다.

4·3평화재단 관계자는 “4·3당시 분야별 피해를 보면 교육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이 나왔다”며 “학교마다 군부대가 주둔해 양민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장소로 이용하면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비극의 현장은 세월이 흐르면서 옛 터만 남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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