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지명과 관련한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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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귀포시와 칠십리 지명 유래
서귀포, 이전에는 풍덕리로 불려
정방동, 마을 정방폭포서 비롯돼
서복이 돌아간 포구라 해 서귀포
칠십리, 서귀포~정의현 거리 유래
서귀포시 서귀동 593-1 칠십리교에 설치돼 있는 서귀포 칠십리 유래 조형물.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을 품은 서귀포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관광지이지만 서귀포 지명의 의미와 유래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번주는 서귀포시지역 내 전해지는 지명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서귀포시 역사 탐방에 나선다.

난파 포경선 추도비.

서귀포시와 정방동의 약사(略史)

서귀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초까지도 홍로현 포구로 이용됐다. 세종 때 제주목 9진의 하나로 서귀진이 들어서고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서귀리(서귀마을)라 불려오기도 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한때 풍덕리(豊德里)라 했다가 다시 서귀리라 했다. 일제강점기 초 솔동산 일대는 몇 가구가 살지 않았지만, 1915년 지금의 동홍동 굴왓에 있었던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커졌다고 한다

19144월부터 대정군 우면을 제주군 우면이라 했고, 19354월부터 제주군 우면을 제주군 서귀면이라 했다. 19468월부터 제주군 서귀면을 남제주군 서귀면이라 했고, 195688일부터 남제주군 서귀읍으로 승격됐다.

19817월부터 서귀읍 일원과 중문면을 통합해 서귀포시로 승격됐다. 이때 서귀 1리와 2리를 통합하여 정방동이라 했다. 정방은 이 마을에 속한 정방폭포에서 비롯됐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제주읍지 정의현지에는 서귀마을은 정의현 관문에서 서쪽으로 70리의 거리에 있다. 민호는 49, 남자는 136, 여자는 156명이다(西歸里 自官門西距七十里 民戶四十九 男一百三十六 女一百五十六), 삼군호구가간총책(1904, 정의군 우면)에는 풍덕(豊德)마을의 연가는 92호이다. 남자 187명과 여자 223명을 합해 410명이고, 초가는 275칸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기록에는 서귀포를 풍덕리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한말(韓末)의 한 시점에서 서귀포는 풍덕리(豊德里)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이후 어선들이 어로 작업 차 바다에 나갔다가 화를 자주 당하는 것이 마을 이름(풍덕리의 풍덩풍덩) 때문이라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풍덕리에서 다시 서귀포로 고쳐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 전해온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어부 5세대가 어장 확보를 위해 이주해 지금의 천지연 주차장 부근인 내팥에 거주하며 고래공장도 세웠다. 서귀포 인근의 바다에서 고래를 포획해 가공하기 위해서다. 고래공장은 1980년대에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지금의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바닷가 위에 있는 동산 잡초 우거진 곳에는 난파된 포경선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훗날 이 고장 출신으로 도지사를 지낸 강성익은 일본인과 합작으로 단추공장과 해산물 등 통조림 공장을 시설했고, 이 시기를 거치며 서귀포는 일대 큰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서귀포 칠십리 유래 비석.

서귀포 칠십리 유래

다음은 이익태 목사가 1696년 제주를 순력하여 쓴 지영록(知瀛錄: 김익수 역, 제주문화원, 1997)에서 빌려온 글이다

의귀촌사(衣貴村舍)에서 말을 먹였다. 현에서의 거리는 35리이고, 촌 마을은 40여 호이다. 상하쇠돈(上下牛屯)을 지나 홍로천(洪爐川:서홍리 소재 선반내)을 건넜다. 이곳에 도착하니 생수(生水)가 있었다. 홍로는 면의 이름이고, 한라산 정남(正南) 방향의 산기슭에 있으며 땅이 비옥하고 샘물이 달아, 비록 한 겨울이라 하더라도 항상 봄처럼 따뜻하다. 해저무는데 서귀소(西歸所)에 도착했다. ()은 해변에 임해 있는데 바로 요해처(要害處)에 해당됐다. 정방과 천지 두 연폭(淵瀑)이 그 좌우에 있고, 여러 마장(馬場: 당시의 3둔장, 황우장, 현자장을 지칭) 안에는 기승(奇勝)이 볼만 했다.’

중국인들을 비롯한 타민족들도 오래전부터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알고 바다를 건너며 제주와 왕래했다. 진시황이 보낸 서복() 일행이 거쳐 간 데서 유래한 말이 서귀포라는 설도 있다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1653)에는 서귀포(서귓개)는 정의현 서쪽 70리에 있다. 서귀포는 원나라에 조공할 때 순풍을 기다리던 곳이다(西歸浦在顯七十里朝元時候風處).’라 쓰여있다. 1940년대 가수 남인수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서귀포 칠십리는 몽골이 탐라를 지배하던 시기에 원나라로 진상하는 물건을 실어나르기 위해 이용하였던 도로였다. 정의현에서 서귀포 포구까지의 70리 거리인 이 길은 근대까지 이용됐던 한질(大路)이었다.

서복은 3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에서 불로초라 여긴 영지버섯 등을 구한 후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글자를 새겨 놓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전한다.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서복이 돌아간 포구라고 불려지다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제주학자인 김석익(1885-1956)이 편찬한 파한록에 의하면, 1877(고종 14) 제주목사 백낙연이 사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타고 내려 글자를 탁본했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긁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서복 일행이 제주에 도착한 곳은 지금의 조천포구로, 옛날 지명은 금당포이다. 서복은 이곳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영주산에 무사히 도착하게 도와주신 천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고, 조천(朝天)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기기도 했다고 전한다

조천이라 새긴 바위는 고려시대 조천관을 건립하면서 매몰된 것으로 전해진다. 경남 남해 상주면 양아리 금산 거북바위에는 가로 1미터 세로 50센치 크기로 서불과차(徐市過此)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석각은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서복이 불로장생약을 구하기 위해 남해를 다녀가면서 새긴 것이라 전한다. 1974년 경상남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됐다.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인 금강산과 지리산 방장산을 찾아갔던 흔적으로 보인다. 눈여겨 볼 것은 경남에서는 서복과 관련된 지역을 지방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복일행이 동쪽으로 건너갔다라는 서복동도(徐福東渡)의 역사적 배경은 신선사상의 유행에 있었다. 중국의 신선사상은 불로장생하는 신선의 존재를 믿고 그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는 사상이다. 신선사상의 불로장생술은 도가의 노자, 장자 사상과 음양오행설, 불교, 유교, 무격신앙 등에서 형성되었다 전해진다. 신선사상은 형해소화(形解所化) 즉 형태를 벗고 귀신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신이 된다는 데에서 연유된 기복사상이다. 중국에서 신선사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제나라이다. 중국사기 봉선서에는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 연나라의 소왕이 신선과 불로장생약이 있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을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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