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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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길 수필가

봄을 마중하고 싶어 친구와 함께 산에 올랐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다소 걸렸으나 강행하기로 했다. 성판악 휴게소를 출발하여 백록담을 거쳐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다. 초입에 들어서자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있어 오늘일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옷을 벗은 나무들이 봄에 태어날 새싹을 위해, 숨결을 고르고 있어서인지 사방이 고요하다.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럽다.

영국의 등산가 말로리는 당신은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었을 때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산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는 어머니의 품과 같다. 그래서 산은 생명의 산실이며 보고寶庫이다. 어머니는 생의 시작이요 끝이다. 세상에 태어나 눈을 처음 마주친 이도, 말을 배워 내뱉은 첫 마디도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마흔다섯에 나를 낳았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때라 궁핍하기 그지없었고 젖도 말라붙어 젖동냥을 다녀야만했다. 한참 자란 후에도 젖가슴을 헤쳐 쪼그라든 젖을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산이 되어 그곳에 있다. 나는 지금 고희의 나이가 되어 그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안개가 자욱한 심산유곡에 들어서고 있다. 잎이 떨어진 가는 가지에는 작은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마치 안개꽃이 피어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옆을 보니 고목枯木이 어린나무에 기대어 밀어를 나누고 있다. 죽어서도 잊지를 못하는가보다. 우리의 인생도 동행의 삶이 아니던가.

어릴 때 나는 어머니를 따라 지들케를 하러 동네 산을 오르곤 했다. 이리저리 삭다리를 꺾고 솔잎을 긁어모으는 일은 나에게 더없는 즐거운 놀이었다. 넘어지면 일으켜주던 손길이 그립고,

끼 등짐을 지고 뒤를 따르던 나를 살포시 바라보던 눈길도 그립다.

냇물소리가 들린다. 봄을 알리는 신호이며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이다. 산은 물을 품어 숲을 키우니, 성철스님의 법어가 생각난다. 산과 물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상록수인 구상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덮인 눈도 털어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고난을 이겨나가는 모습에 외경심이 인다. 나무들은 삼각형의 수형을 이루면서 고고한 자태로 하늘을 향해 열병閱兵을 하듯이 서 있다.

삼십 중반에 자녀가 딸린 상처한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의 삶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으나, 두 분이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늦은 밤까지 각짓불 아래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아련하다.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일생의 희망으로 알았다. 내가 십년을 모시다가 산수傘壽에 돌아가셨지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고 믿었던 어머니의 영혼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백록담 정상을 오르는 경사면에 이르자 순간 구름이 걷히고 시야가 확 트였다. 동쪽 아래로 예쁜 국그릇을 엎어 놓은 듯한 봉우리가 보인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닮았다. 분화구에는 짙푸른 물이 가득하여 신비하기 그지없다. 사라오름이다.

드디어 한라산 정상에 섰다. 백록담은 가는 겨울이 아쉬운 듯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안개구름이 스쳐 지나면서 흰 눈 위에 현무암 바위가 불쑥불쑥 내솟아 다가와 서있다. 제 어미의 육신으로 끓인 죽인 줄도 모르고 죽을 먹은 오백 명의 아들들이 비통하게 울다가 바위가 되어 굳어졌다는, 오백나한과 어머니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바위가 살아 움직이며 어머니-!’ 하며 울부짖는 것만 같다. 이 슬픈 전설의 어머니 사랑, 그 무엇에 비할 수가 있으랴. 나도 나직이 어머니라고 불러본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커피를 한잔 하며 숨을 돌린 후 다시 하산 길에 나섰다. 적송 군락지를 지나고 있다. 붉은 색을 띠며 의연하게 치솟아 운치가 있고 기개가 넘쳐 보인다. 궁궐을 짓는데 쓰인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일명 좁은 문에 이르렀다. 길 양쪽에 어깨 높이만한 바위가 버티고 서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 보인다. 성경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쓰여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일 홀로 앉아 돋보기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온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없는 살림에도 나눠주기를 좋아했던 어머니는, 분명 좁은 문을 통과하셨으리라. 내 인생을 돌아보니 이 순간 마음이 무겁다. 날도 저물고 갈 길도 멀지 않았다. 이제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들리는 속삭임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 어찌하면 좋은가.

 

*지들케 : 땔감

*삭다리 : 삭은 나뭇가지

*각짓불 : 등잔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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