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군대 해산에 분노…온 국민의 국권 회복 거사
(129) 군대 해산에 분노…온 국민의 국권 회복 거사
  • 제주일보
  • 승인 202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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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돌, 일제 맞선 의병 활동
 김재동, 함덕리 추도비 건립
 김재연, 조선 말기 제주판관
 김재용, 공직 모범 정의군수
 김재욱, 제주 기민 구율 치적
 김재진, 日 오사카 항일 활동
대전 유성구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 있는 고사훈 지사묘. 김재돌은 1909년 조인관과 김만석 등과 함께 고사훈과 이중심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했다.

김재돌金在乭생몰년 미상. 한말韓末 제주 의병. 제주면 동광양(과양)에서 거주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일본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고종 황제를 군대로 위협해 강제로 퇴위시켰다

순사(巡査) 강원호(康源鎬)는 조인관을 체포하려 했으나 뿌리쳐 도주했다

190733일 고승천과 김만석은 총살되고 의병참모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됐다.

이중심, 조인관, 노상옥 등은 귀덕(歸德) 포구에서 육지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의병 활동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데 대해 온 국민의 분노가 분출돼 국권 회복을 외치는 데서 일어난 거사였다

일본은 1908년 제주경찰서장에 통감부(統監部)의 경부(警部) 시미츠(淸水重滿)을 임명해 부임했다.

또한 대정, 정의, 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分派所)를 설치해 도민을 위협했다

윤원구(尹元求) 제주군수는 일본이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이 나라의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했으니 어찌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제주도를 떠났다.

1909225일 조인관의 집에서 김재돌과 9명이 모여 기병(起兵)할 것을 결의하고 의병장에 고사훈(高仕訓)과 이중심(李中心)을 추대했다

190933일 주성(州城)을 점령하기로 정했다. 격문과 통고문을 2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돌려,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225일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안성·광청 등지에서 장정 300여 명을 가담시켰다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는 관군·장정 30여 명을 동원해 경찰과 공조하면서 의병 활동을 차단했다. 이에 무력에 의존한 경찰과 맞설 수 없어 228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당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지게 됐다

김재동金才童1910(융희4)~1931(일제강점기), 제주도 함덕리의 추도비 건립에 따른 항일활동. 본관 김해

김양수(金良守)의 아들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1931115일 일본 도쿄 순천당(順天堂)병원에서 함덕리 출신 한영섭(韓永燮)이 사망해 119일 그 시신이 향리에 도착, 동지장(同志葬)으로 결의했다

정부에서는 19934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재연金載淵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1750(영조26) 4월 이한동(李漢東)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5211월에 떠났다

17505월 제주 진공進貢 수행원 6명이 서울에서 죽었다

그 중에 벼슬을 구하던 출신 홍우관(洪宇寬)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가우(駕牛)를 지급하고 홍우관의 처자에게는 구휼하도록 했다. 17509월 제주에서 여역(癘疫)으로 882명이 죽었다

김재용金在鏞1853(철종4)~1902(광무6), 한말의 관리. 정의군수

본관은 경주이고 제주 성내 김낙선(金樂善)의 아들이다. 자 공삼(恭三), 호 은동(恩東)이다.

해방 후 남제주군수를 역임한 김영진(金榮珍)의 조부이다.

1899(광무3) 27일 강인호(康仁鎬)의 후임으로 정의군수로 도임하고 190115일 중추원(中樞院) 의관으로 떠났다

18997월의 관보에서 김재용을 누가 초수라고 하리요. 곧 숙련된 듯이 성심으로 보답하기를 꾀하니 미래에 효과를 가히 기약하리라.” 

19008월조에 성품이 순박하고 정사가 공평하니 아전은 심복하고 백성은 편안하며 청렴결백하여 위세를 부리지 않고 엄격하며 일에 전념하며 화합하게 만드니 잘 다스려짐이라. 더욱 정성과 근면으로 끝내 나라에 보답을 기약하였다라고 김재용의 치적이 기록돼 있어 공직생활에 모범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1977년 제주시 사라봉 공원 모충사에 건립된 ‘의병항쟁기념탑’의 모습.

김재욱金再郁1722(경종2)~?, 문신. 제주판관, 평안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자는 문백(文伯)이고, 본관은 연안이다. 김국태(金國泰)의 아들이다

1753(영조29) 문과 식년시에서 을과로 급제, 1783(정조7) 2, 이형묵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85(정조 9) 7월에 떠났다

이최중(李最中)이 무옥(誣獄)에 연좌돼 추자도로 유배되고 1784년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17852월 제주 삼성묘(三姓廟)에 사액했다

제주 유학(幼學) 양경천(梁擎天)의 상언으로 대신들과 의론해 시행했다

17855월 제주 삼읍의 기민 총수는 58960명이고 이들을 잘 구휼해서 목사 엄사만이 가선대부로 승진됐다.

또한 판관 김재욱과 정의현감 이갑룡(李甲龍)도 품계를 올려 조용(調用)하고 원납인(願納人) 고취선(高取善)은 가자(加資)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김재진金在珍1912(일제강점기)~1959, 일본공산청년동맹에 가입, 일본 오사카에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조천읍 신촌리 숙군태생이다.

19334월 이좌구(李佐九)의 소개로 전협(全協) 화학 간사이 關西지부에 가담했다

19336월 일본공산청년동맹의 동지구책임자 정우생(鄭友生)의 권유로 문서배포를 했다

19336월 하순부터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고 김재진도 71일 체포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 대판형무소 북구형무지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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